꿈을 따라 길을 나서다
아직도 결혼은 진행중~
나에게 친정은 마음의 거리로 자동차로 4~5시간은
가야하는 먼 거리에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떠나시고 지난해 엄마마저 가신
이후로는 친정이라는 이름마저도 마음에서 지워졌다.
아버지엄마가 마지막까지 살다가 가신집은 내가
사는곳에서 30분이면 족한곳이었다.
엄마가 손이 필요하여 나를 부르지 않으면
두분생일과 설과추석, 보너스로 어버이날에 찾아가
두어시간 머물다 오는것이 전부였다.
전화도 엄마가 필요하면 늘 먼저 하셨기에
내가 드린 안부전화는 일년에 몇번 안되었다.
엄마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은
나의 삶을 단정히 살아내며,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엄마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물질적인 삶이 나보다 훨씬 더 부유했고
아버지와의 문제만 없으면 걱정이 없는 삶이셨다.
아마도 2남3녀 우리의 형제자매가 모두 동일한
생각이었을것 같다.
엄마는 늘 아파하셨고 일도 많이 하셨다.
아버지에게는 어떤 실수도 하지 않으려 애를 썼고
뒤탈(?)이 나지않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하셨다.
세탁기가 있음에도 아버지 옷은 손빨래를 하셨고
아버지를 위한 밥상은 늘 5첩반상 이상이었다.
딸들이 행여 아버지에 대한 기대치를 가질까봐
딸들에 대한 아버지의 차가운 반응과 태도를
만날때마다 일러주셨다.
스물여섯에 결혼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와 엄마의 품을 떠나왔다.
2남3녀중 넷째, 위로 오빠와 언니 둘이 있었기에
집안에서도 크게 쓰일 일이 없었고, 사고를 치거나
야단을 맞을 일도 없어서 자라는 동안에도 나라는
존재가치는 희미했다.
아마도 나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치가 낮은 것을
알기에 엄마의 품을 떠나서 온전히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준비도 없이
나는 결혼을 단순하고 호기롭게 결정해 버렸을 것이다.
결혼을 결정하고 진행되는 과정속에서
남편의 가족과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내가 잘하면 되는 일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며
개의치 않았고 불안함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그저 내가들은 아버지와 내가 본 아버지를
떠나는 것으로 또 엄마의 힘든 삶에서 짐덩이
하나를 치워주고 싶은 마음으로 결혼의 문을 힘껏
열었으리라 그때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
'나는 아버지같은 남편을 만나지 않을 것이며
엄마처럼 남편에게 목메는 삶을 살지 않을테다'
수없이 나를 향하여 다짐하고 약속했다.
아버지와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은
출발이었다.
자라면서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바쁘셨기에 아버지와 마주앉을 기회도 없었다.
엄마는 늘 아버지의 밥상을 따로 차리셔서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어 본 적도 없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늦은 저녁에 오셨기에 퇴근하시는
아버지에게 "다녀오셨어요"가 제일 긴 문장이었다.
일요일 쉬는 날 아버지가 계실때에도 엄마는
우리를 단속하시며
"조용히 해라 아버지 쉬신다 주무신다"로
우리에게 주문을 걸었기에 크게 웃는일도 소리내며
노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내가 고등학교입학 무렵에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직장을 따라 막내 남동생을 데리고 거주지를
옮기셨다가 5년후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엄마는 여전히 아버지 앞에 나를 얼씬도 못하게
단속했지만 나도 서울서 직장생활을 2~3년 한지라
간이 조금 커져 있었고 아버지가 그리 무섭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엄마를 제치고 아버지에게 배우고 싶은
것들을 말하여 수강료를 타내기도 하고 용돈도 받아서 썼다.
국민학교 5학년때인가 엄마를 졸라 피아노를 배웠었다.
배운지 얼마되지 않아서 최신식 오르간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내가 피아노를 배운다는 것을 아시고
아버지가 사주신것이다.
그시절엔 종이 건반으로 피아노 연습을 하던 시절이라서
오르간이 집으로 온 사실은 대단히 놀랄 일이었다.
학교에서도 음악시간에 삐걱거리는
오르간으로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었다.
아버지가 나를 위하여 학교에 있는 오르간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선물해 주신것이다.
피아노를 막 배우기 시작한 나에게 말이다.
아마도 내게 아버지의 사랑이 찐하게
각인된 날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를 떠나는것보다 엄마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더 원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엄마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렇게 미운 아버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즈음에 오빠와 큰언니는 결혼을 하였고
작은언니는 큰언니의 마트개업을 도와주러
서울로 간 후였다.
집에는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 셋뿐이었다.
나는 제법 손끝도 야물고 눈치도 있어서 엄마의 눈밖에
날 일이 없었지만 셋만의 동거는 힘이 들었다.
엄마에게 이야기 상대는 나밖에 없었고
엄마의 관심사는 오직 작은언니의 결혼인데
작은 언니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으니
눈이 내게로 쏠릴수 밖에 없었다.
엄마의 눈을 피하여 탈출을 시도한 나는 늦은
나이였지만 학교를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버텨봐야 엄마 손바닥 안이었고
아버지와 엄마사이의 냉전을 버틸 지혜도 없었다.
남편을 소개받은지 두달만에 결혼이 이루어졌다.
나는 아버지와 엄마에게서 분리되어 인격적 독립을
하는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통영에서 달콤한 신혼을 시작했다.
쉽게 떠나온 마음이라고
쉽게 결정한 결혼이어서
쉽고 편안한 길만 주어지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던 인생은 엉성했고 덜컹거렀다.
인생광야의 태풍에 지붕이 날아가는 참혹한 현장에
서기도 하고, 슬프고 불안한 날들과 마주하기도 했지만
나는 돌아갈 곳도 위로하며 안아줄 사람도 없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나와 함께 사는 동안에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풀지 못하셨다.
아버지와 엄마의 삶에서 나는 그저 실패자가 될뿐
아무것도 아니란것을 알았기에 더 부지런히
살아내었던것 같다.
이만큼에 와서 돌아다보니
인생에서 몰아치는 태풍이나 밀려오는 파도가
다 불행의 씨앗은 아니며
좋은 환경이 모든 상황의 행복을 보장하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시절부터 느꼈다는 것이
내게는 복이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야말로
주어진 삶에서 우리가 가질수 있는 가장 반짝이는
훈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행복은 내가 나에게 주는 점수이다.
내 삶이 그것을 드러내고 증명한다.
나는 오늘 내게 불어오는 순풍에 몸을 맡기고
마음의 고요가 주는 평화를 가득히 누린다.
내일 또 내일의 삶에서도 파도나 바람을 만날수 있다.
나는 진심을 다하여 온 마음으로 내게 온 것을 환영하며
피하지 않고 뜨겁게 안아주려 한다.
나는 내가 선택한 결혼이 아직도 진행중이어서 감사하다.
어느새 딸과 아들도 짝을 만나 한걸음 한걸음
가고 있는 모습이 좋다.
내게도 도전이 되고 용기가 된다.
아버지와 엄마는 많은 부를 가지셨음에도
자식들에게도 사랑받ㅈㅣ 못하셨다.
남편은 아버지를 20대 초반에 잃고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부자는 아니지만 남편과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며
삶을 응원한다.
아이들도 우리의 삶을 존중하고 저희들이 가고있는
인생에 우리를 초대해 주었다.
나는 이제 아들과 딸, 사랑스런 두커플을 나란히
앞세우고 순풍에 돛단듯이 신나게 따라가 가볼 요량이다.
#나의에세이 #앤의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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