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더위는 추석을 앞두고도 물러가지 않고,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대조차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웃돈다. 발 붙이고 선 사람들이 때를 잊은 습한 열기에 피로를 호소하는 동안, 그 아래에서 쉼 없이 움직인 땅은 꾸준히 태양으로부터 멀어져 해는 점점 늦게 올라 빨리 저문다. 같은 길 위에서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날마다 다르다.
머리에 매단 불빛을 따라 길가에서 드문드문 붉은 꽃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숲을 태워 밭을 일구고 살던 화전민들이 떠난 자리에 인근 주민들이 심은 꽃무릇이 사면에 무리 지어 하나둘 피었다.
꽃무릇은 석산(石蒜)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단단한(돌) 마늘'이라는 뜻이다. 꽃무릇의 알뿌리의 맛이 맵고 마늘 냄새가 나는 데서 비롯되었다. 잎이 없는 꽃대에 핀 붉은 꽃은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다. 열매를 맺지 않고 알뿌리로 번식하는 꽃무릇은 향으로 곤충을 유인할 필요가 없어서다. 자연의 생(生)에는 허투루 쓰이는 것이 없고, 저마다의 소용과 인과로 서로가 연결된다.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가는 숲은 헐겁다. 대지로 내리는 빛의 양이 줄고 밤의 온도가 내려가며 무성했던 녹음의 채도는 낮아지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엽록소 뒤로 숨어있던 노랗고 붉은 색이 조금씩 일어난다. 어떤 가지의 잎은 벌써 노랗고 붉고, 어떤 가지는 이미 앙상하다. 나무와 숲의 계절은 일시적이지 않고 제 사정과 속도에 맞춰 서서히, 그러나 쉬지 않고 온다. 나무의 초록은 초록이되 전과 같은 초록이 아니고, 초록의 일체가 느슨해지기 시작한 숲의 색은 어수선하다.
계곡을 따라 난 산길에 해가 든다. 가지를 내어 하늘로 나아갈 수 없어 땅과 돌, 나무 위를 기고 매달린 이끼는 습기를 머금은 아침의 숲에서 한층 푸르다. 이끼는 육지에 처음으로 적응해 다른 식물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먼저 자라고 지며 땅을 일구거나 스스로 작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대기에서 물과 영양분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제 몸보다 많은 물을 가두었다 내놓으며 숲과 주변의 습도와 수량 조절에 일조한다.
제대로 된 보호막이나 거름막 없이 언제나 온몸으로 부딪히는 생의 적극성에도, 이끼는 높이 뻗은 나무나 형형색색의 꽃에 비해 보잘것없는 취급을 받거나 '물가가 많은 곳에 나는 푸른 때' 정도로 여겨졌다. 최근 들어 대기오염의 지표생물이니 이산화탄소 흡수와 같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잠깐 회자하였다가도 자연의 많은 것들처럼 금세 잊힌다.
이끼 주변으로 작은 버섯들도 고개를 들었다. 버섯은 스스로 양분을 만들지 못하고 죽거나 살아있는 어딘가에 붙어 산다. 기생하거나 공생하며 포자가 싹을 틔운 균사(곰팡이실)가 덩어리져 땅 위로 솟아 나온 것이 버섯인데, 세상에 그 모양을 갖춰 보이고 며칠 혹은 수 시간 내 대개 사라진다. 나무에 붙어사는 구름버섯과 같은 목재부후균 제외하고는 숲에서 버섯을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찰나는 짧고, 그동안에도 버섯은 온 힘을 다해 눈에 보이지 않는 수백억 개의 포자를 멀리 퍼트린다. 아침 햇살을 따라 눈에 드는 깊은 산속의 다채로운 생명을 걸음마다 서서 몇 번씩 들여다본다.
국립공원은 해상 면적을 제외하면 국토의 4.0%에 불과하지만, 생태계의 보고이자 개발과 파괴로 내몰린 동식물의 마지막 보루다. 2023년 기준 환경부에서 지정한 멸종위기종(282종)의 약 68%인 191종이 지리산을 비롯한 23개의 국립공원에 사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국토 면적의 0.4%에 불과한 지리산국립공원에는 총 8,869종의 생물이 사는데, 이는 국내 기록 생물종 전체(60,010종)의 15%다.
국토의 전 지역에 개발을 금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보호와 보존을 위해 지정한 국립공원과 같은 지역이 확대되기는커녕 그마저도 지속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근시안적이고 제한적으로 계산된 '경제 논리'는 마치 모두를 위한 것으로 위장되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린다. 한번 훼손된 자연은 복구하는 데 더 큰 비용과 시간이 드는데도, '친환경'이나 '영향 최소화'를 내세운 계획은 많은 경우 일부의 이익에 맞춰 변경되고, 약속은 쉽게 잊히고 무마된다.
(왼)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생물(국내 기록 생물종), (오) 국립공원별 출현 종 현황. 출처: 국립생물다양성센터, 『2023 국가생물다양성 통계자료집』
짙은 색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국토의 4%에 불과한 국립공원조차 지속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출처: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인 가리왕산은 천년 넘게 보존돼 왔던 천연림이자 생태자연도 1·2등급 지역으로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 지정한 보호지역 등급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속한다. 태백산맥의 중앙에 위치한 가리왕산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경기장 조성으로 훼손된 후 복원되지 않은 채 6년째 방치되고 있다. 산림 78만㎡가 훼손됐고, 잘려나간 나무가 5만 8000여 그루에 달한다.
생태계는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곤충, 새와 같은 야생 동물과 식물, 미생물에 물, 바람, 공기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가리왕산은 그저 나무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허리가 잘려 나갔다. 스키장 개발로 하봉 정상부의 자연 철쭉군락은 사라진 지 오래고, 곤돌라가 있는 곳의 나무는 여전히 잘려 나가고 있다. 결국 그 영향은 사람들에게까지 미쳐 반복되는 산사태와 휩쓸려간 토사로 상수원이 오염될 위험도 커졌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에서 내가 제일 잘나고 나만 소중하다는 의미로 자주 오인된다. 그러나 이는 나만을 우선하는 교만이 아니라, 내가 소중하듯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소중하다는 생명 존엄의 선언으로 봄이 마땅하다. 오인된 해석은 이기주의지만, 참뜻은 개인주의인 셈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서도, 사람과 자연이 함께 존재하는 곳에서도 다양성의 힘은 크고 깊다. 서로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살 때 개별의 존재는 건강하고, 위기와 변화에도 느슨하게 연결된 서로를 지탱하며 버텨낸다. 숲에 사는 이름 모를 버섯과 이끼, 계절마다 저마다의 속도로 피고 지는 꽃과 나무, 그 안을 누비는 산토끼, 삵, 반달가슴곰은 이미 모두 동등하다. 잠시 머무르는 객(客)임에도, 사람만이 자주 제 처지를 잊고 염치도 없이 시끄럽고 무례하다.
해가 뜨고도 한참을 지나 도착한 대피소 앞마당에는 홀로 찾은 산객 두어 명이 널찍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수대의 위치를 묻고 지나오고 나아갈 길을 묻다가 산과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통성명도 하지 않고 두서없이 늘어뜨린 과거의 조각들 사이에 분별이 자리 잡을 곳은 없다. 사람의 소란을 피해 찾은 산에서 가끔은 나지막하게 오가는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동안, 잊고 지낸 산과 나의 이야기를 다시금 찾아낸다.
이곳의 높은 산에 올랐다 저 멀리 높은 산으로 가려 했는데 국토를 한 번에 가로지르는 교통편이 없어 성사되지 못한 미련한 계획의 후일담에 산객은 그 시절의 나보다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는 제 몸이 감내할 수 있는 정도를 제때 알지 못해 수년 동안 무릎 통증으로 산을 찾지 못했다. 그와 나의 배낭은 큰 산의 품에 들며 필요한 채비로 오밀조밀 채워져 있었고, 집에서 씀 직한 냄비와 솥을 넣은 더 크고 무거운 배낭을 지고 이곳을 지났을 불과 십수 년 전의 산객들에게 함께 경외를 표했다. 오래도록 원하는 만큼 산을 걸을 수 있도록 서로의 무사와 안녕을 기원하며 제 갈 길로 나아간다.
거듭 멈춰 지나온 길과 서 있는 곳을 둘러보며 나아갈 때를 자꾸 잊는다. 마주 오던 국립공원 직원은 언젠가 천왕봉에서 마주친 기억을 먼저 떠올리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어깨에 걸린 큰 카메라 때문으로 짐작하지만, 누군가의, 특히 산을 아끼는 이들의 기억에서 소환되는 일은 드물고 귀하다. 사람으로 번잡하지 않으니 느린 걸음을 재촉할 일 없이, 오가는 이와 마주한 숲과 하늘에 요란하지 않은 웃음을 나누는 호사를 누린다.
영신봉에서 촛대봉을 향해 피어오르던 구름은 벌써 제석봉을 넘어 천왕봉을 향한다. 장터목대피소에서 내려갈 생각이었다가 좀처럼 없는 고즈넉한 산길에 구름을 따라 발걸음을 앞으로 옮긴다. 하산길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구름이 드리운 숲으로 어둠이 일찍 내려앉아, 동이 틀 무렵 넣었던 랜턴을 다시 머리에 매단다.
오르고 나면 내리고, 내리고 나면 다시 올라 끝내 그 끝에 닿는다. 가까이서 보면 불규칙한 오르내림의 연속이지만, 멀리서 보면 산길은 결국 평평하다. 당연한 것을 기억하면 초조함은 누그러진다. 나만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소중하다. 당연한 것을 기억하면 모든 존재가 안온하다. 당연한 것이 당연히 생각되지 않아 언제나 문제가 생긴다.
탐방로를 걸을 때마다 트레일러닝을 하는 이들에 대한 의심을 거두기는커녕 자꾸 깊어진다. 불과 두어 해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눈에 띄지 않던 에너지젤 봉지나 빈 페트병이 너무도 많이 버려져 있다. 물론 트레일러닝이 아니라 하루나 이틀 산행을 하는 이들의 소행일 수도 있고, 산길을 종일 뛰는 사람들이 급증한 것과 버려진 쓰레기며 무질서함의 증대가 뚜렷한 상관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사탕 봉지의 끄트머리 정도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던 '실수'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끄트머리를 뜯고 난 봉지의 나머지가 연이어 버려져 있거나, 떨어뜨리거나 버리는 행위를 자각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페트병과 같은 큰 쓰레기에서는 고의성이 다분히 보인다. 고의란 행위자가 그 불법행위를 하기 위해 의지가 있었는가를 말한다. '버리겠다'도 고의이고, '버릴 수도 있지, 그래도 어쩔 수 없지'도 고의다.
고의성이 다분한 쓰레기들
짐을 챙길 때부터 쓰레기를 최대한 만들지 않고, 가져온 쓰레기는 되가져가는 것은 산을 찾을 때 기본적인 상식이고 양심의 마지노선이다. 그럼에도 지리산국립공원은 2018년부터 2022년 7월까지의 집계 기준, 쓰레기 배출량(533톤)이 가장 많은 국립공원이었고, 매년 200여 톤이 버려진다고 한다. 쓰레기 투기에 이어 각종 불법행위도 적지 않다. 특별보호구역 출입, 흡연, 고성방가, 음주 등 행위유형도 다양하다.
"국립공원 직원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정화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탐방객에 의해 쓰레기로 오염된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무단투기를 하지 않으면 수거할 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