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언제나 양가감정이 든다. 나에게는 산이, 지리산이 그렇다.
사람의 발길이 늘수록 망가지는 자연에 나의 부족한 말과 글이 행여 조금이라도 일조하는 건 아닐지 두려우면서도, 자연이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존중받고 보호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닿기를, 간절한 생각으로 오늘도 주저하다 서툴게 쓴다.
칠선계곡은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 천왕봉과 제석봉 사이에서 발원한 물이 합쳐진 계곡이다. 지리산의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된 물은 깊은 골을 따라 저 아래 마을까지 닿는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의 추성마을에서 칠선계곡을 따라 지리산에 들 수 있는데, 추성주차장에서 비선담까지는 별도의 예약 없이 오를 수 있지만, 비선담부터 천왕봉에 이르는 구간은 특별자연보호구역으로 안전사고 우려가 적은 봄과 가을의 몇 달 중 날씨가 좋은 주말(금,토,일), 하루 60명에 한해 예약 후 탐방할 수 있다.
아직 사방이 거뭇거뭇한 주차장에 인원 확인과 안내를 위해 국립공원 직원들이 세운 테이블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개방 초기에는 국립공원 직원이나 지정된 안내인이 인솔했다가, 지금은 조약돌만 한 스마트트래커와 짙은 노랑의 식별 스트랩을 각자 부착한 후 개별 산행으로 진행된다. 구간별 권장 안내 시간이 적힌 배너에는 '무리한 산행의 책임은 탐방객 본인에게 있다'는 말이 적혀 있다.
추성마을에서 천왕봉까지는 9.7km로, 상시 개방 구간인 비선담-상원교까지는 데크와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계곡의 중상류부터 천왕봉에 이르는 5.4km는 자연 식생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방의 식별 스트랩과 비슷한 짙은 노란색의 표식을 나무에 달고 인위적인 장치는 최소화했다. 한정된 사람들이 신원을 밝힌 후 들어설 수 있는 길은 사람의 흔적도, 특히 걸음마다 보이던 크고 작은 쓰레기를 보는 일도 드물어, 깊고 높은 산을 바라보며 하늘로 뻗은 나무부터 반들거리는 돌멩이까지 길을 두루 살피며 나아간다.
삼원교를 지날 무렵 햇살이 나무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하고, 헐거워진 숲과 그 사이를 흐르는 장쾌한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부터 길 위의 이끼까지 눈과 발이 닿는 곳곳이 초록이던 초여름을 지나 다시 찾은 숲은 빛바랜 나뭇잎과 이끼로 덮여 완연한 가을색이다. 비가 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큰 산이 머금었던 물은 계곡과 산길 곳곳으로 넘쳐흐른다. 낙엽이 쌓인 길은 더욱 미끄럽고, 딛으며 건너야 하는 돌은 자주 물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해발 900m쯤의 칠선폭포를 지나 대륙폭포로 향하는 길은 물에 완전히 잠겨 있었고, 건너야 할 세찬 물줄기를 눈앞에 두고 발을 디딜 곳이 마땅치 않다. 뒤따르던 산객 둘이 이리저리 돌을 밟아 길을 찾고 먼저 건너가 내 스틱을 대신 잡는 동안, 나는 두 발과 양손으로 바위에 매달렸다. 건너는 동안 나의 왼발은 물에 깊숙이 빠졌고, 두 산객은 그들의 도움이 수포가 된 듯한 탄식을 내뱉었다. 남은 힘도, 나눌 무엇도 한정된 산길에서 감사하다는 인사 외에는 나에게는 건넬 것이 없었다.
마폭포를 지나면 물길이 잦아들고 이내 고도 500m 이상을 높이는 1.6km의 가파른 오르막에 접어든다. 권장 시간에 비해 1시간 이상 뒤처지면 돌아오라는 아침의 기억을 떠올리고도, 지나온 거센 물길을 되돌아가는 것보다 도중에 해가 져도 잘 정비된 탐방로를 천천히 걷는 편이 안전하겠다는 판단으로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나아간다. 추성주차장에서 천왕봉까지는 8시간 이상 걸리는 길고 험한 길이다. 사정이 있어 당일로 돌아왔지만, 산행 짐은 조금 늘어도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무리해서 내려가기보다 먹거리 등을 조금 더 챙겨 장터목대피소에서 묵었다 가는 것도 방법이겠다.
넉 달 전 이 길을 처음 오를 때는 그날 아침 들머리에서 만난 한 산객과 함께였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사진을 찍고 멈춰서는 나를 멀찍이 서서 기다리곤 했다. 원시림의 길을 덮은 연푸른 이끼를 따라오는 나에게 손짓으로 알려주고, 앞서 걷는 걸음에 보이는 쓰레기를 맨손으로 주워 옆구리에 찬 쓰레기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대체로 서로의 보폭을 신경 써야 하는 동행이 있는 산행을 피했던 나는 그날 실컷 사진을 찍고 찍어 주면서도 오늘보다 빠르게 같은 길을 걸었다. 물통이 바닥을 드러낸 거친 오르막에서 아직 얼음이 서린 '생명수'를 나눠준 그는 가을의 이 길을 다시 걷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여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겨우 닿은 천왕봉 정상석을 넋 놓고 바라보던 그와 나는 통성명도 하지 않고 안전한 산행을 기원하는 기약 없는 인사를 건네며 헤어졌다. 그보다 늦은 시각, 홀로 찾은 천왕봉에는 어느새 모여든 구름 너머 가을 저녁의 어스름이 서서히 깔린다. 그날보다 분명 힘이 들었는데, 카메라 속에 담긴 해맑은 나의 모습은 그날과 다름없다.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든 순간부터 쓰레기가 대거 눈에 든다. 초록색 소주병은 보호색을 띤 카멜레온처럼 수풀 사이에 숨겨져 있었고, 군데군데 고의로 버리고 간 쓰레기들은 규모를 더하더니 산 중턱의 한 쉼터에는 단체로 라면을 끓여 먹고 그대로 젓가락이며 봉지를 버리고 갔다. 대피소 취사장과 같은 지정된 장소가 아닌 곳에서 취사는 불법이다. 걸음이 바쁜데도 차마 스치지 못하고 하나둘 담다 보니, 종일 한산했던 쓰레기봉투 하나가 금세 가득 찬다.
칠선계곡은 자연 보호와 보전을 위해 자연휴식년제가 도입된 1999년부터 출입이 통제됐다.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은 칠선계곡의 경관과 자연생태계 보전을 위해 계곡 일대 12만 4,000㎡, 비선담부터 천왕봉까지 5.4km에 대해 2008년부터 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칠선계곡 일대는 구상나무, 주목, 만병초, 신갈나무 등 아고산대 식물상과 숲 등 원시적인 생태환경에,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인 반달가슴곰을 비롯해 II급인 삵과 담비, 너구리, 오소리 등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어 생태적으로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 해발고도 1,700m의 제석봉과 장터목 고산지대의 나무들까지 마구잡이로 베어 팔던 불법 도벌꾼들의 마수는 칠선계곡에도 예외 없이 뻗쳤다. 수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들이 쓰러지고, 큰 나무를 아래로 이동하기 위해 작은 나무들을 베어 길을 만들고 담이나 소를 막았다. 1967년 12월 지리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로도 불법행위나 개발은 계속되다가, 1995년 이래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이 지리산 곳곳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보호하면서 서서히 식생을 복원해 나갔다.
칠선계곡은 영구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칠선계곡 탐방예약 및 가이드제를 통해 한정적으로 탐방이 허용됐다. 산객을 대상으로 음식과 숙박을 제공해 수익을 내던 추성마을 주민들의 민원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나, '죽음의 계곡'이라는 별명에서 추측할 수 있듯 산악회들이 험준한 골짜기를 따라 무분별하게 비법정 탐방로를 다니며 생긴 사고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 번이었다가 지금은 세 번으로 확대 시행되고 있음에도, 마을 어귀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더욱 개방하라는 성토 글이다. 칠선계곡은 2027년 이후 개방 여부가 다시 논의된다.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으로 이루어진 '자연(自然)'은 말 그대로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거나 절로 이루어지는 산, 강, 바다, 식물, 동물 등 모든 존재나 상태, 또는 그것을 이루는 지리, 지질적 환경을 뜻한다.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산과 강, 바다를 찾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러한 존재'들을 마주하고 그 안에 자신 또한 그러하게 머물고 싶은 마음을 품곤 한다. 깊고 넓은 지리산을 찾을 때마다 나는 스스로 그러한 존재들 속에서 나를 찾고 또 잊으며,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음을 떠올린다.
숲속의 식생을 자르고 파헤쳐가며 사람을 위한 계단을 놓고 시설을 설치해 천왕봉이든 칠선계곡이든 반드시 나의 두 발로 딛고 서야 할 당위나 명분은 없다. 여러 사람이 발로 밟고 지나간 땅에는 답압(compaction)으로 풀도 꽃도 자라지 못하고, 점점 흙이 패고 쓸려나가 안전을 위한 추가적인 구조물이 필요하게 된다. 백무동에서 장터목대피소로 오르는 평탄한 길에 못 보던 데크가 설치된 것도 이러한 이유라고 했다.
조사와 연구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지정된 국립공원이나 보호구역에서도 자연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자연을 접하고 머무를 수 있도록 탐방로를 지정하고 관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개발과 개방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는다. 시설을 설치하고 공사를 하는 일은 산 전체에 영향을 준다. 거기다 사람의 발길이 잦은 곳에는 늘 쓰레기가 차고 넘친다. 겨우 보존하고 복원한 식생이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나, 되살리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도 그 결과를 언제나 장담할 수는 없다.
밤잠을 설쳐가며 나온 택시 기사는 집합 시간까지 어둡고 추운 길에 혼자 있을 나를 걱정해 추성마을까지 일부러 천천히 차를 몰았다. 플래카드를 내건 그곳 마을 주민들도 그와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일 텐데, 너와 나와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적절한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는, 이 합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지리산일 것이다." - 신용석, 『알고 찾는 지리산』, 자연과생태
몇 걸음에 한 번씩 멈춰서서 눈앞의 자연을 허겁지겁담아온 사진들과 사람들이 버린쓰레기로 가득 찬 봉지, 따뜻했던 사람의 기억은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한데 엉켜 내내 덜컹거렸다.
칠선계곡 탐방로에서 6월에는 없던 산악회 리본이 국립공원의 표식 옆에 매달려 있어 떼어냈다. 지난 방문과 이번 사이에 개방된 날은 20일 남짓인데 그사이에 매어놓은 것이다.
작은 쓰레기가 드물게 보였던 칠선계곡 탐방로에서 벗어나 천왕봉부터 중산리까지 쓰레기는 그야말로 폭증했다. 천왕봉 바로 아래에는 보호색을 한 듯 소주병이 푸른 수풀 사이에 숨겨져 있었고, 천왕샘 조금 아래에 있는 데크 뒤로 손이 닿지 않은 곳에는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렸다.
법계사로 가는 길의 한 쉼터에서는 산객 여럿이 라면을 끓여 먹고 버린 봉지와 나무젓가락, 반찬을 담았을 스티로폼 그릇이 찢겨 흩어져 있었다. 종일 걸어온 탐방로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제한된 인원만이 오가는 길에서는 열 시간 가까이 걸으면서 주운 쓰레기가 한 줌도 채 되지 않았는데, 1시간도 되지 않아 봉지 하나가 금방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