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물을 담은 유리컵에 흙을 한 줌 넣는다. 흙은 물을 진동하며 흐린다. 움직임을 더하면 물과 흙은 삽시간에 한데 섞여 분간 없이 뿌옇다.
흙을 덜어내는 방법은 여럿이다. 시간이 지나 고요해진 물속으로 가라앉은 흙을 조심스레 떠내거나, 더 많은 물을 부어 흙을 밀어낸다. 혹은 아예 컵을 비우고 다시 물을 채운다. 때때로 컵을 깨끗이 씻어 맑은 물은 오롯이 채울 수 있도록 한다. 종종의 수고를 거치지 않으면, 컵의 이물과 때를 제거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복잡다단한 생(生)과 마음의 작동을 컵, 물, 흙에 비유하는 것은 비약에 가깝지만, 본질은 단순할 때 가장 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시시각각 자극과 '정보'라는 이름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로 머릿속은 어지럽고, 마음은 부산하다. 손안의 기계 위에서 손가락을 까닥이는 사이 채워지기보다 소모되고 휩쓸린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제대로 소화되거나 배출되지 않고 켜켜이 쌓인다. 안으로 무엇이 쌓이는지도 모르거나 외면한 탓에 몸을 고루 움직여 내는 일이 갈수록 적어지는데 어느 때보다 몸과 마음이 더불어 고단하다.
얼마간의 오염물질을 스스로 정화할 수 있었던 자연이 더 이상 그렇게 될 수 없게 된 것처럼, 복잡한 알고리즘과 최첨단 연산으로 쏟아내는 자극은 한 사람이 소화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기술이 선사한 연결성과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인간의 생존 본능은 기묘하게 결합하여, 실시간으로 무언가를 취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뽐내지 않으면 도태되어 버린다는 현대의 불안을 초래한다. 부단한 노력과 의지 없이는, 내 마음과 몸이 어떤 상태인지 돌아볼 수 있는 틈은 허락되지 않는다. 안으로 까맣게 쌓인 것들은 덩치를 키우며 단단히 굳어가고, 여유를 잃은 마음은 궁지에 내몰린다.
보통의 의지, 어쩌면 그보다 유약한 내가 온갖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성공적으로 지켜냈을 리는 만무하다. 무리에서 멀어져 홀로, 무너지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거듭할 뿐이다. 그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좀 더 어렸던 시절 영화와 책을 파고들었던 것에서 지난 몇 년간 종종 산길을 걷는 것이 더해졌다.
수 시간 산길을 걷는 동안 눈앞에 주어진 상황에 집중하도록 강제된다. 스치는 잡념에 주의를 빼앗길라치면 돌부리에 발이 걸린다. 걸음이 빠르지 않은 데다 무리 지은 사람의 소란을 피하거나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보면, 해가 저물어 가는 사이 앞서 써버린 여유를 메우려 걸음을 재촉하기 일쑤다.
온몸을 괴롭히며 산길을 걸어내고 눕다시피 앉은 귀갓길 버스에서야, 산을 오르기 전까지 한데 뒤섞여 혼란을 거듭하던 안의 것들이 비로소 침전되거나 그 형체를 살필 수 있는 얼마간의 거리에 있게 되었음을, 어떤 것들은 앞선 걱정과 괴로움보다 크지 않음을 어렴풋이 알아차린다. 다시금 일상에 휩쓸리면서도 희미한 순간의 기억은 근근이 살아남아 분리와 단절이 절실할 때, 게으르고 안락하게 있고자 하는 갖은 핑계 속에서도 크고 깊은 산길을 염원하며 기어코 향하게 한다.
산을 찾는 인파가, 그중 젊은 층이 몇 해 사이 눈에 띄게 늘었다. 대체로 무리를 지어 시끄럽고 번잡하다. 해를 넘겨 다시 찾은 험준한 산길은 마음의 대비보다 훨씬 소란했다. 목 좋은 곳에서 '인증'을 위해 무리 중 하나가 포즈를 취하면 여럿이 둘러싸고 환호하며 제각각의 기기로 찍기를 인원수만큼 거듭하는 동안 소리를 막을 벽이 없는 산은 온통 떠들썩하다. 한참을 앞서가도록 기다려도 잦아들지 않아 새와 바람 소리를 뒤로하고 이어폰을 꺼내 귀를 틀어막는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도, 그 행위를 계속하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누군가를 죽이고 다치게 하는 것만이 해가 아니라, 타인의 안녕을 침해하는 것도 해가 된다는 건 모르는 걸까. 쓰레기를 버리지 않거나 여럿이 모인 곳에서 목소리를 낮추는 등의, 사회적 존재로 자라며 익히는 타자에 대한 존중과 상식적인 배려, 사리 분별을 무리 지은 이들은 자주 잊는다.
배우지 않는 데다 보고 듣지 못하여 아는 것이 없다. '무식(無識)하다'의 사전적 정의다. 무식한 행동을 하면서도 무리를 방패 삼아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니, 부끄러움을 알 방도가 없다.
늦추고 늦춰진 걸음으로 공룡의 등뼈를 닮은 능선을 힘겹게 오르내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어르신 넷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로 서로를 기다리거나 요란스럽지 않게 북돋아 준다. 나눈 말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언젠가 지리산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떠올라 은연하게 웃음이 난다. 덕분에 또래의 못난 군집으로 뾰족해진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기나긴 하루의 끝과 산길의 끝이 만나는 지점에 다다른 안도였을지도 모른다. 함박꽃나무, 산바람, 잠깐의 천둥번개와 비, 구름, 풀 내음, 좋아하는 것이 가득했던 산에서의 하루는 다행히 그렇게 저물어 간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거듭 질문하고도 여전히 제대로, 아니 조금도 답하지 못한다. 세상을 뒤흔들 무언가를 내놓을 재간도 포부도 없다. 다만 산길에서 마주한 사람의 무리와 사람의 말을 하지 못하는 생명들을 떠올리며, 오늘 나의 말과 행위가 나와 동일시되는 아주 가까운 주변뿐만 아니라 먼 존재에게도 따뜻하게 닿았을지, 혹은 나의 편의와 즐거움을 위해 타자의 안락을 침해하고 그들이 누릴 권리를 부지불식간에 빼앗은 것은 아닌지를 돌아볼 수 있을 뿐이다.
다가올 생의 나날이 자기만을 내세우는 이기(利己)보다는 멀고 가까이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형태의 타자를 향한 이타(利他)로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유동하는 삶에서 어떠한 점을 하나 정해두고 나아가는 것만큼, 어딘지 모를 목적지로 나아가는 매일의 흐름을 돌아보고 가다듬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평범하고 작은 나를 설피 위로한다.
산에서 내려와 서둘러 집으로 향하지 않고 익숙하고 낯선 도시에서 밤을 보내기로 한다. 낙낙한 저녁참으로 배를 채우니, 이제야 체증이 내려간 듯 한가로이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돌아보니 오늘도 다시금 감사하게도, 산길을 거닐며 나눈 것보다 나눠 받은 것이 참 많다.
+ 탐방로 여기저기의 쓰레기들. 오늘도 부지런히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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