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지나간 자리"를 보고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을 마주하게 됩니다. 모두가 수많은 선택 끝에 비로소 지금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결정해야 할 순간은 때때로 너무나도 잔인하고, 슬픈 결과를 불러온 자신의 선택은 우리를 깊은 후회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결정을 내린 이를 탓할 수 있을까요.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는 주인공 톰 셔본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랑과, 사랑을 위해 했던 선택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비극,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작은 따스함을 파도에 실어 우리의 마음을 쓰다듬고 지나갑니다.
영화는 톰 셔본(마이클 패스밴더 역)과 이저벨 셔본(알리시아 비칸데르 역)의 사랑이 꽃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톰은 1차 대전에 참전하고 생환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수많은 상실을 겪었고 많은 것을 잃어버린 그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 고독함에 어울리게 그는 등대지기로서 바닷가 마을 야누스로 왔고, 그곳에서 이저벨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직 삶만을 바라던 톰에게 이저벨은 비구름 사이로 점점 스며드는 햇살처럼 긴 상실과 고독 끝에 찾아온 구원이었습니다.
마을과 동떨어져 있는 등대와 집에서 지내야 하지만 톰과 이저벨은 서로에게 영원을 약속했습니다. 톰이 등대에서 일할 때면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창문과, 어딘가 고장 나 있는 피아노, 소박한 농장 말고는 별 것도 없는 외딴곳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들은 행복했고 아이도 가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은 좀처럼 맺어지지 않았고, 두 번에 걸친 유산은 상냥하고 따스하던 이저벨을 무너뜨리고 사랑으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등대에는 슬픔이 차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비극에도 아내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의사의 진찰마저 거부하던 이저벨과 함께 그 슬픔을 노력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너무나도 기다려 왔던 아이를 잃은 슬픔에도 의연하게 버티며 보여준 이저벨에 대한 사랑은 보는 이의 가슴도 뭉클하게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었습니다.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들에게 갑자기 파도에 한 남자의 시체와 아기가 실려 왔습니다. 톰은 이를 상부에 보고함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 하지만 이미 두 아기를 떠나보낸 이저벨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너무나 갖고 싶었고, 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톰은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선택의 순간을 마주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는 죽어 있었지만 아이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고, 자신도 이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지만 아이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그들은 어머니로부터 남편과 딸을 빼앗은 잔인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아픔과 톰의 전부였던 사랑하는 이저벨의 절망은 그의 이성을 흐리게 했고, 결국 아이를 데리고 있기로 선택합니다.
사실 관계를 놓고 봤을 때 이는 분명 잘못된 선택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만약 그의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고, 필자도 이 선택은 분명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절망을 감내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들이 겪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생각한다면, 누구도 자신 있게 그럴 수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아름다운 등대 옆 집에서 딸 루시를 키우기 시작하고 그들은 행복해 보였지만, 잘못되었음을 알고 내린 선택이었기에 세 가족의 행복한 웃음도 폭풍전야같이 보는 내내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루시와 함께한 행복은 마치 모래 위에 쌓아 올린 성 같았고, 톰이 루시의 생모 해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 성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었지만 톰은 이저벨에게 알릴 수 없었습니다. 흘러넘치던 상실감을 루시로 인해 겨우겨우 추스르고 있던 이자벨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처사고, 톰은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톰은 상실이 가져오는 비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미 이를 두 번이나 겪은 이저벨에게, 자신에게 삶을 가져다준 이저벨에게 다시 겪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가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저벨도 어쩔 수 없이 루시의 생모 해나와 마주치게 되고, 그 상황을 지켜보는 톰의 표정은 지금까지와 같이 묵묵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슬픔의 파도가 울렁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정지된 화면이었지만 클로즈업되고 있다고 느낄 만큼 그의 표정은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혼자 떠안고 있던 선택에 대한 대가가 루시와 쌓은 수많은 추억과 행복만큼 불어나 셔본 부부에게 닥쳐오고, 감정선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올라갑니다.
이 영화에서 톰이 내린 선택에 대해 도덕적으로, 또는 법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모두가 그마다의 참담한 비극 속에 있었는데 도대체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해나는 애타게 찾던 자신의 딸이 돌아왔음에도 자신은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말을 들어야 했고 이는 남편과의 사별과는 궤를 달리하는 고통이었겠지요. 셔본 부부도 그들이 내린 선택에 대한 무거운 대가를 치렀습니다.
포스터에서 "미치도록 지키고 싶은 사랑, 내 모든 선택은 당신이었습니다"는 작중 톰이라는 인물을 잘 나타냅니다.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에 이입해 참 많은 생각을 했지만, 저도 제 모든 걸 주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문판인 "The Light between Ocean" 포스터에는 위 문장 대신 "Love demands everything"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요구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톰에게는 선택에 대한 대가를 감수할 만큼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영화 내에서도 마이클 패스밴더의 화려하지는 않지만 묵묵하면서도 아려 오는 표정들은 그의 사랑과 슬픔을 고스란히 우리에게도 느끼게 해 줍니다. "I'll just try to keep the light burning for whoever might need it" (빛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계속 불을 밝히겠습니다)라는 대사도 톰의 사랑을 포함한 많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외에도 셔본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 등 수려한 대사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여담이지만 두 배우를 실제로 부부의 연을 맺게 해 준 작품이기에, 꼭 보는 걸 추천드리고 싶네요.
잔잔하고 애절하면서도 보는 이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생각할 거리가 참 많아 두 시간 내내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 아름다운 영화이기에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고, 특히 미칠 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나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