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글쓰기 교육의 추억
학창시절부터, 대학생, 대학원생, 이후 고시공부 할때까지도 작문시간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보니 상당히 많은 논리적 글쓰기 강의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주로 작문시간, 혹은 글쓰기 라는 이름의 수업이었는데 ‘고시 답안지 작성하는 법’ 특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 추천한 전형적인 글쓰기의 논리구조나 전개방식은 예외없이 다음과 같다.
먼저 서론에서는 써야하는 주제나 문제, 쟁점에 대해 쓰고 아, 진짜 시의적절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거들어준다. 이어 본론에서 언급할 주장 3가지 정도를 요약하며 “두괄식”으로 제시하라고 한다. 대개 찬성입장, 반대입장의 요지를 고루 써준다.
본론에서는 보통 2-3문단을 쓰게 된다. 하나의 쟁점에 대해 찬성입장도 있고 반대입장도 있는데, 본론 1에선 찬성입장을, 본론 2에선 반대입장을 쓴다. 각 문단에서 찬성과 반대를 아주 풍성하고 균형있게 잘 써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간단히 주제를 요즘 뜨거운 이슈인 "의사정원 증원" 문제로 해보자. 본론 1에선 “의사정원 증원”에 대한 찬성입장은 이러이러하고 이러이러한 논거가 있다”고 잘 쓴다.
그런데 본론 2에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의사정원 증원”에 대해서는
반대입장도 만만치 않다. 그 논거는 이러이러하다. 등등 이렇게 쓰라고 한다.
바로 앞에서 내입으로 찬성입장을 장황하게 말해 놓고서는...
이렇게 본론 1과 2를 서로 상반되는 두 입장을 “균형있게” 써 준 다음, 마지막 결론에서는 “의사정원 증원”에 대해서는 찬성입장도 반대입장도 있고 하니, 두 입장을 “균형있게 살펴 잘 추진해야 하겠다” 는 식으로 서둘러 결론을 내린다.
내가 자라오면서 받은 어떤 작문수업에서도, 글쓰기 특강에서도 비슷했다. 대학원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도 않았다. 내가 한쪽 주장이나 하나의 입장을 고수하면 그것은 균형잡힌 것이 아니니 양 입장을 균형있게 써야한다는 것이다. 결론에서 최고의 가치는 중도와 균형 이었다.
내가 본 최악의 경우는 본론에서는 양 입장을 균형있게 써놓고서는 결론에선 갑자기 한 입장을 용기있게 택하면서 쓰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결론에서 다른 입장도 잘 살펴봐야겠다는 식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한다. 이것이 최악인 이유는 본론에서 양측 입장의 비중이나 서술방식을 균등하게 해놓고서는 갑자기 결론에서 나는 한쪽 입장이야 라고 하는 것이 외형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균형 잡히지 않은 글이다.
나의 주장이나 의견은 언제 쓰나요?
한번은 이렇게 항상 찬성입장, 반대입장을 균형있게 서술한 다음 결론에선 잘 해보자는 식으로 마무리하면, 나의 주장이나 입장은 언제 쓰나요? 하고 예의바르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가 무슨 금기를 발설한 것인양, 찡그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 주장을 하는 건 위험해.
찬성입장도 있고, 반대입장도 다 있는데,
섣불리 어느 한 입장을 취했다가
읽는 사람이 반대입장이면 어떻게 되겠어?
그러니 항상 찬반 입장을 다 써주고, 결론에서도 끝까지 균형을 유지하면서 나와야 해."
요는 절대 글쓰기에서 자기주장을 하면 안되고, 세상에 흩어진 모든 주장을 균형있게 총망라하여 다 쓰는 열과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다.
이제... 인생에서 취직시험의 시기도 끝나가고 누구의 평가도 받지 않는 시기에 와보니 알겠다. 결국 이것은 글쓰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문제이다. 내 주장을 하면 안되다고 생각하니, 글쓰기도 그렇게 지도하게 되는 것이다. 내 주장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기니 글쓰기도 그렇게 지도한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평가까지 하니 우리 학생들도 그렇게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균형있는 글쓰기 기술은 발전할 지 몰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은 퇴화한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이런 글쓰기 방식으로 훈련 받으면 글쓰기 자체는 기술적으로 균형있게 발전할 지 몰라도, 생각하는 훈련은 퇴화한다. 내 생각을 뾰족하게 다듬기보다 남의 생각을 두루두루 수집하는데 시간을 쏟는다. 주섬주섬 모은 남의 생각들을 조각보 이어 붙이듯이 균형있게 종이에 옮겨 적는다. 자기 주장을 가급적 하지 말고 모두의 입장을 균형있게 인정해주고, 결론은 내지말고 두루뭉실하게 비껴가게 한다.
이런 글쓰기를 좋은 글쓰기라고 가르침 받고 자라면 생각하기를 멈추게 된다. 청소년기부터, 혹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남의 생각을 두루 잘써주는 기능적인 균형자가 될 뿐, 내 생각과 내 주장을 설득력있게 주장하지는 못하게 된다. 혹시 누구의 주장을 빠트린건 없는지 주변을 더 살핀다. 정작 내 의견이 무엇인지, 내 입장은 어떠한지 살펴보진 못한다.
정작 내글인데 내입장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