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요약식의 개조식 보고서는 한국의 고유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한국의 고유 문제나 한국의 언어습관에 고유한 것이 아니다. 우리 국회의 희의록, 상임위 검토보고서, 예산 보고서, 예정처의 검토보고서, 법원 판결문 등 어떤 보고서도 모두 서술형이다. 학교에서도 과제나 보고서, 독후감 모두 서술형이다. 학계에서도 논문, 페이퍼, 과제 모두 서술 형태의 글쓰기이다.
개조식 보고서는 한국에서도 유독 정부기관, 관공서의 고유문제에 불과하다. 각종 교육원이나 직업능력개발 기관에서도 개조식 보고서를 어떻게 잘 쓸 것인지에 대해 특강을 한다. 공직사회의 영향력 때문인지 일반 기업에도 이런 개조식 보고서가 마치 더 나은 양식인 양 권장되기도 한다. 왜 우리는 개조식 보고서를 사용하고 장려하며, 심지어 강제하고 있을까?
사실 ‘~함’, ‘~음’ 등 끝맺음하는 개조식은 일제시대의 잔재라는 설이 유력하다. 소준섭의 기고문에 의하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무단 진군하고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 고종에게 <내정개혁방안 강령 5개조>를 강요하였다. 군국기무처 주도하에 공문서를 근대적으로 개편한다는 명분으로 칙령 제1호로 ‘공문식(公文式)’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이후 대한제국에서 내각을 비롯한 관공서에서 공문서를 작성할 때 일본인 고문이 모든 문서를 검토하고 결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고문이란 사람들엔 군인이 많았고 군대의 명령이나 작전문서가 최상의 모범인 양 축약형을 전파, 독려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제시대에 기안문(起案文)을 비롯한 모든 공문서에 이른바 ‘문어(文語)’체를 적용시켜 ‘함. 음. 임’으로 끝나게 하였다. 대표적으로 <을사늑약>의 전문도 모든 조항의 끝이 ~~함. 으로 끝난다. 소위 ‘개조식(個條式)’ 문장이 처음 등장하는 시점이다.
반면, 구한말에도 우리의 일반적인 문서나 글은 한글이 이미 일반화되었고 문장의 끝은 "~이다.", "~이니라"같은 서술형으로 쓰고있었다. 일본에서조차 일반 시민들이나 사회의 글에는 ~다. 라는 서술형이 쓰였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권위가 요구되는 상급 문서나 정부의 문서, 법령, 조약 등에 유독 이런 개조식 문장을 사용했다고 한다. 즉 일본에서조차 개조식 글이나 개조식 문장은 군대중심 문장형태로서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잔재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일본에서도 ‘~함’, ‘~음’으로 끝내는 개조식 문장방식은 법률, 공문서에서 완전히 폐지되어 현재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1945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관공서, 정부를 중심으로 ‘개조식’ 문장을 계속 쓰고있다. 새로 들어오는 신입 직원들에게도 첫번째 과업으로 개조식 문장형태를 배우게 한다. 청년들은 그전까지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닐 때까지 써본 적이 거의 없는 개조식 보고서를 비로소 취직한 다음 새로 배워야한다. 마치 전통을 유지하는 것처럼 개조식 글쓰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에 의하면, 개조식 글쓰기란 우리나라 공무원이 공문서 작성에 사용하는 특유의 관료주의적 글쓰기 방식을 말한다. 국립국어원의 박용찬 연구원에 따르면, 개조식이란 용어 자체는 아마도 일본어의 ‘항목으로 나누어 쓰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개조식 글쓰기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앞서 1편에서도 상술하였다. 그런데 이준웅 교수가 지적하는 개조식 글쓰기의 가장 큰 결함은 격조가 없다는 데 있다.
개조식 글쓰기의 가장 큰 결함은 격조가 없다는 데 있다.
문장의 내용이 명료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과 태도도 천하다. 비유컨대, 귀한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모셔놓고 단백질과 비타민 복합제를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는 식이다. - 이준웅
개조식 보고서가 일제 군국주의의 잔재임을 강조하지 않아도, 해방 이후 일제시대의 잔재를 재론하지 않아도, 정부기관이나 일반 사회의 간극을 다시 거론하지 않더라도,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세상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서술식 보고서가 더 유용할수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의 대부 다니얼 카네만(Daniel Kahneman)은 그의 저서 『Thinking, Fast and Slow』에서 인간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의 사고체계를 번갈아 가면서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시스템 1’적 사고는 직관의 영역이다. 생존을 위해 단련된 사고체계로 즉각적인 반응을 가능하게 해준다. 반면, 시스템 2는 논리적 이해의 영역이다. 논리적으로 심사숙고하는 체계로 통계, 과학, 분석을 위해 가동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동속도가 느리다.
두 체계는 그 상황에 맞게 가동되어야 한다. 빠른 판단과 느린 판단 모두 다 필요하되, 상황에 맞게 가동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시스템 2 모드가 필요할 때에 시스템 1 모드가 가동될 때다. 시스템 1 모드에서는 생존을 위해 빠른 판단을 요구하는데, 숙고와 논리적 사고가 필요한 상황에서 시스템 1모드를 가동시키면 편향과 잘못된 의사결정을 할 위험이 커진다.
한 블로거의 글을 인용해본다. “복잡한 상황, 다양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리더들의 종합적, 논리적 사고가 더욱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당연히 개조식으로 작성되어 오던 문서들의 목적과 효용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적 직관을 포함한 시스템 1만으로도 충분한 결정 위주의 조직이라면 지금의 개조식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잡한 정책,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해야 하는 기관들은 의사결정권자들의 시스템 2의 원활한 가동을 위해서라도 개조식 보고서를 서술식 보고서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이런 변화를 실행하는 데에는 돈 한 푼이 들지 않는다." - 2020.5.28, “개조식 보고서, 이제는 버려야 할 때”, 2020년 5월 28일 by jwvirus, https://ppss.kr/archives/219017,
2018.4월 아마존의 CEO인 제프 베조스는 주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부터 파워포인트나 도표 그림으로 된 보고서는 지양하고, 서술형 메모보고서 (Six-page Naratives Memo)를 사용하겠다고 공표한다. 우선 처음에 시각적 효과가 뛰어난 PPT를 없앤 것에 대해 아마존의 전 부사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거대한 조직이 변화를 시도하려면 실행 방침은 간단명료해야 합니다. PPT는 이를 방해합니다. PPT 슬라이드는 이야기를 조각 내죠. 그러면 한 아이디어를 다른 아이디어와 비교하기 어려워져요. 아이디어의 논리보다, 발표자의 언변에 따라 의사 결정이 이뤄집니다. PPT 도표는 또 이해를 돕기보다 주의를 산만하게 만듭니다".
본격적으로 사업이나 아이디어 기획 단계에서는 기획 보고서가 아닌 보도 자료(PR)와 자주 하는 질문(FAQ)을 제일 먼저 작성한다. 아마존은 이 두 문서를 합쳐 PR/FAQ라 부른다.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낼 때 무조건 고객 처지에서 생각하게 하려는 장치다. 전 부사장인 브라이어와 카는 이 방식을 아마존을 ‘1등 회사’로 만든 비결 중 하나로 꼽는다.
"기획 단계부터 내부자(공급자)가 아닌 고객(수요자) 관점에서 만들려는 것이죠. 일을 거꾸로(backwards) 해야 했습니다. 그 출발점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일반 대중에게 발표할 보도 자료를 먼저 쓰고, 예상되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 만들어 보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기획보고서, 본 보고서를 작성한다. 본 보고서는 6쪽짜리 서술형 보고서를 만들어 이사 회의에선 30분간 차분히 정숙모드로 6페이지에 빼곡히 적힌 서술식 보고서와 각종 데이터를 모두가 둘러 앉아 읽는다. 이사들이 둘러앉아 잘 쓰여진 보고서라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 읽을 필요가 있다. 이 6장짜리 보고서가 나오기까지는 내용을 기획하면서 초고를 잡고, 잘 모르는 동료들에게 읽혀 피드백을 받아 교정해야. 이후 다시 읽고 또 동료들에게 읽히는 과정을 통해 보완된다. 정착된 아마존의 모든 보고서는 여섯 페이지에 걸쳐서 서술식으로 작성되기에 대충 읽는 게 불가능 하다. 그래프나 컬러도 못 쓴다. 따라서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고, 서술형이기 때문에 주체나 서술, 방향에 있어 오해하기 어렵다. 책임주체가 명확하고, 언제 뭘 한것인지 시간에 따른 행위순서도 명확하다. 뭘 할 것인지 대상과제도 명확하고, 기대되는 효과도 분명하다.
2016년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PPT 금지령'의 효과를 정리해 페이스북에 올렸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 지금도 대다수의 기업에서는 PPT를 장려하고, 이를 이용하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직원들은 PPT를 만드는데 내용보다는 더 예쁜 이미지와 글씨체를 고민하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또한, 슬라이드를 단편적으로 던지다 보니 논리 체계가 드러나지 않다보니, 행위와 주체, 책임관계가 모호해지기 쉽상이었다. 현대카드의 움직임이 기업들의 보고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됐고, 두산그룹 등 다른 기업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 Erik Larson, 2018.10.10, "How Jeff Bezos Uses Faster, Better Decisions To Keep Amazon Innovating" (forbes.com)
- 이준웅, 2017, "소통과 먼 ‘국정운영 5개년 계획’ ", [미디어 세상]소통과 먼 ‘국정운영 5개년 계획’ - 경향신문 (khan.co.kr)
- 소준섭, 2024.1.4, "공문서 문장을 바꿔야 공직사회가 바뀐다", 민들레, 공문서 문장을 바꿔야 공직사회가 바뀐다 < 민들레 들판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 조선비즈 [Cover Story], “ 前부사장 2인이 밝힌 ‘아마존은 이렇게 세계 1등이 됐다’”, 2021.4.9, https://www.chosun.com/economy/mint/2021/04/09/PZIICFXGZJG4JEIOON4SYVRH44/
- 블로그, 2020.5.28, “개조식 보고서, 이제는 버려야 할 때”, https://ppss.kr/archives/219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