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을 그대로 재현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러므로 형상을 옮기는 일을 그만해야 한다. 이 일련의 행위가 일어난 지 벌써 백 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 그림은 '~은 ~이다.'라고 확언하지 않는다. 그림은 내가 알고 있는 사물을 확인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은 무엇이라고 확인되어야 하고, '그것은 ~이다'라는 어구로 소개된다. 이때 그림은 말과 문자와 사물을 학습시키는 그림카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인식은 끈질기다.
인식의 전환은 일부 계층의 일이다. 대다수는 일상을 살아야 하기에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도 때때로 고개를 돌려 혁신에 감탄할 줄 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여기에 속한다.
의식은 파이프가 분명한데 이미지 아래에 그게 아니라는 말이 메모되어 있다. 의식과 따로 노는 이미지는 생소하다. 내 인식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흔히 르네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하는데 나는 이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의 그림은 무의식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것보다 그의 그림은 이미지와 언어의 관계, 더 나아가 인식의 한계에 골몰하게 한다.
마그리트는 "그림의 제목은 설명이 아니고, 그림은 제목의 삽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과 제목의 연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길들여진 눈은 쉽게 행동할 수 없다. 행동은 의식의 검열을 받아야 하기에 굼뜨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에 어떤 상징이 있는 건 아니다. 그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지 않았고, 자신의 그림을 상징적으로 설명하지 말라고 했다.
마그리트는 형상을 파괴시키지 않고 확언을 통해 규범을 벗어난다. 그의 그림은 재현된 무엇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푸코는 그의 그림을 '유사인 것처럼 보이는 계략'이라고 했다.
문자요소와 조형요소가 전혀 일치되지 않고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마그리트의 그림은 누구보다 클레와 칸딘스키를 닮았다. 이들에게 "이게 무엇이요?"라고 물으면 즉흥, 구성, 아침시간의 명상, 노란색의 중간 등등으로 답할 것이다. 차라리 묻지 말걸. 후회될 정도로 오리무중의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종합적인 확언을 기대하지만 화가들은 분리된 요소를 가리킨다.
마그리트의 그림과 제목 사이에는 매우 괴상한 관계가 형성된 차라리 비-관계라고 결론짓고 싶다. 연관성을 찾기 위해 수고해야 하는 비-관계 때문에 우리는 쉽게 독자가 될 수 없고, 관람자가 될 수 없다. 마그리트는 "나는 내 그림이 친숙한 영역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제목을 붙인다."라고 말했다. 그는 불난 집에 불을 낼 작정인가 보다.
문자와 조형의 불일치는 서로를 파괴한다. 이들은 은밀히 서로를 공격하며 서로를 밀어낸다. 그림의 공간을 후벼 파는 건 언어, 텍스트이다. 형상은 자기 공간에서 나와 고립되어 마침내 자기 자신에서 멀어지거나 혹은 비슷한 모습을 증식시키며 재창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