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태생적으로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망각할 수 없다. 삶의 달콤함을 누리며 이것이 지속되기를 갈망한 이들에게 예술은 풍요와 쾌락을 확인하거나 재생산하는 장치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예술이 부역자 노릇만 한 건 아니다. 예술은 누구보다 민감하게 통치자의 감각을 알아차렸기에 권력자의 비위를 알아서 맞추어줄 줄도 또는 비꼬기도 할 줄 알았다.
이제 세상이 변했으니 예술이 과거처럼 누군가의 힘에 의하여 좌우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은 계급 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계급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차별화된 자신을 위하여, 사회적 성공을 향하여 직진하는데 판단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집중될수록 그러하다.
작가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일단 유명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명성을 얻어 유명해지면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쌓이는 경제적 가치에 매혹되어 물건 제작자가 되어 가기도 한다. 오늘날 미술품은 보물단지가 되었다. 투자의 대상인 미술품은 때때로 주식 거래와 흡사하다.
예술은 사회적 지위와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존속되는 분야인가?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이 누구나 무엇이든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사실 그것은 로망일 경우가 허다하다. 고전주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전원의 축제와 비너스의 환생 그리고 꿈결 같은 황홀한 시간은 매력적인 일이지만 누구나 누릴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인상주의는 극한의 상태가 아니라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소재에서 쾌락을 발견했고, 선사했다. 이들은 도시, 시골, 카페, 침실, 해변, 강가 등 일상의 모습을 조화로운 상태로 묘사했다. 이러한 그림은 갇힌 상태의 실내가 아니라 실외로 사람들을 안내하며 자연에서 비롯되는 감동과 치유까지 경험하게 한다. 덕분에 인상주의 그림을 싫어할 사람은 거의 없다.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에 바탕을 둔 한 순간의 현상, 덧없이 사라지는 빛과 색에 집중했다. 이들이 지닌 관찰의 기민함과 감각적인 붓놀림은 이들이 얼마나 거듭되는 변화의 순간에 집착했는지 알게 한다. 이처럼 단편적인 것에 빠져든다는 건 길게 붙잡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걷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속도는 기술 발전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술은 삶의 모습을 바꾸어놓고 생업의 터전도 바꾼다.
속도에는 무엇이든 변한다는 진리가 깃들어 있다. 결과가 급한 사람은 속도를 따라잡아야 된다는 강박을 갖기 쉽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듯 쉽게 바뀌는 전환의 속도에 모두 발맞출 필요는 없다. 유속이 빠를수록 한 사람인 개인은 자신의 심지를 힘주어 잡고 있지 않으면 휩쓸려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쇠라는 인상주의와 동일한 주제를 선택했지만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안정감 있는 방법을 원했다. 당시 원소주기표의 발명이 가져온 파장을 오늘날의 AI에 견주면 과장된 일일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획기적인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원소 주기표는 어떤 물질이든 구성단위로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왔고, 더불어 세상을 완전히 파악하게 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관찰된 장면도 작은 단위로 분할함으로써 가장 객관적인 관찰공식을 수립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까지 갖게 되었는데, 이것을 실천한 화가가 쇠라이다. 쇠라는 인상주의자들의 붓질을 아주 작은 점으로 축소했다. 그의 화면은 숨이 멎을듯한 긴장감과 섬세함으로 점철된 철저한 계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쇠라는 인상주의와 정반대 되는 목적을 실행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