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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May 18. 2024

숨 막히는 색점의 공식

색채분석과 시지각에 관한 과학 이론은 쇠라의 작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그에게 영향을 미친 건 미셀 외젠 슈브뢰이(Michel Eugène Chevreul)의 '색채의 동시 대비 법칙'이었다. 물체의 색깔이 단일한 색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상이 혼합된 인식이라는 주장은 쇠라에게 흥미로운 관점을 선사했다. 이 가운데에서 슈브뢰이는 순색이 일으키는 보색의 여운을 설명했는데, 예를 들어 주황은 파랑을, 빨강은 초록을, 보라는 노랑을 느끼도록 감각의 유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실상 이것은 눈의 망막에서 일어나는 생리적인 현상으로 신경계를 통하여 고스란히 전달되어 인식으로 거듭난다.  


오늘날 순색이 자신의 주변에 보색의 후광을 일으킨다는 건 널리 알려진 광학적 현상인데, 이것은 색채간섭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한다. 즉 우리가 관찰하고 지칭하는 색깔이란 바라본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이웃하는 색의 영향까지 수용한 종합적인 감각이라는 거다. 결국 물체의 색깔이란 하나의 속성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색상이 그물처럼 엮여 서로 상호 작용함으로써 얻어진 일종의 혼합물인 격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쇠라는 색깔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색상을 찾아야 했다. 따라서 그는 수많은 색점들을 불러들여야 했다. 인상주의자들이 순간과 변화에 매혹되어 유동적이고 감각적인 붓질을 휘둘렀다면, 쇠라는 그와 반대편에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묘사했다. 그는 즉흥적인 감각과 묘사보다 고전주의 회화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성이나 영원함을 택했다. 



쇠라, 해변, 1886



쇠라는 프랑스 북쪽지방의 항구를 자주 찾았다. 평평한 해안선, 수평선, 산책로 등 빛으로 충만한 고요한 풍경은 그가 추구하는 바를 나타내기에 적절한 소재였고 동시에 주제가 되었다. 보다시피 그의 화면에는 엷은 안갯속에 펼쳐지는 해수면과 하늘, 제방, 배 등등의 소재 외에 괄목할 만한 것이 없다. 모두는 그 자리에 부동의 자세로 있을 뿐이다. 그런데 쇠라는 이 안에 색점으로 부서지고 분해되기를 그치지 않는 반전을 마련했다. 


쇠라는 관람자에게 풍경의 모습보다 빛의 분석상태를 음미하도록 유도한다. 서로 병치되는 색점들이 그토록 많이 찍힘으로써 완성된 화면은 부드러운 광채로 가득하다. 이것은 쇠라가 자신이 필요로 했던 색상과 명도를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세심했을지 가늠하게 한다. 질서 정연한 점의 세계, 그 저변에 깔린 채색방식과 이로 인하여 묘사되는 형태 사이의 긴장관계는 작은 실수라 해도 전체를 흐트러트릴 정도로 숨 막힐 공식의 전개이다. 


이로써 그동안 회화가 해 왔던 상황 묘사는 단숨에 사라져 버렸다. 쇠라는 모더니즘의 속성을 벌써 꿰뚫고 있었던 걸까? 해체된 세계는 실제 모습을 잃어버리게 한다. 파편은 더 잘게 나뉘어 전문화로 거듭난다. 현대인의 자아상실이 약속된 수순이었는지 되새기게 하는 지점이다. 


<쇠라 이야기는 다음 글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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