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는 가로 3m, 세로 2m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이다. 이 크기의 화면에 촘촘히 박혀 있는 작은 색점의 율동을 인쇄물이나 모니터 등 제3의 매체는 전달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아쉬움을 넘어서 안타까움이다. 관람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람들, 강, 풀밭, 다리 등 형상에 머물며, 여기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원화를 감상한 적이 있다면 추억이라도 소환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상으로 색점을 보아야 한다.
색점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흐트러지는 순간이다. 찰나를 쇠라만큼 안정적인 방법으로 묘사한 화가는 없다. 소리가 파동을 타고 널리 퍼져나가듯 빛에는 파장이 있다. 우리의 눈은 밝기와 색깔로 빛을 알아차린다. 빛의 에너지에 따라서 밝기가 결정되고 시세포의 민감한 광반응이 색깔을 구분하게 한다. 이것은 쇠라의 시선이 되었고, 색채학과 광학에 대한 열정은 그림이 됐다. 쇠라의 해석,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이다.
우리에게는 바라봄의 습관이 있다.
우리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사물을 인식하고 부르는 법을 배우며 효용성도 익힌다. 습관은 이 과정에서 생기며, 재빨리 지각하려는 경제성과 효율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꽤 쓸모 있는 지각 방법이지만, 때때로 최소한의 부분만으로도 다 안다고 확신하는 부작용을 지닌다. 또 습관이 불러들인 익숙함은 무미건조함을 넘어서 은근슬쩍 편견으로 탈바꿈하며 알 수 없는 확신까지 실어 나른다.
그림감상은 누군가의 바라봄을 바라보는 일이다.
우리는 쇠라처럼 세상을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내 시야로 가져올 필요는 있다. 부서지는 공기, 흩어지는 바람은 언제나 변화를 예감하게 한다. 시간은 순간의 연속체, 같은 것을 가져온 적이 없다. 시간의 흐름 따라 모든 게 덧없이 사라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끝이 있다는 대단한 희망도 실어 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