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일제히 어떤 순간에 멈췄다. 이들은 뱃놀이, 낚시, 산책, 일광욕 등 여가를 즐기고 있다가 얼음땡 상태로 굳어버렸다. 그런데 이들의 몸짓은 작위적이다. 마치 연극무대에 올려진 배우들처럼 40여 명에 달하는 모두에게는 맡겨진 역할이 있다. 그건 바로 잘 짜인 동선과 구도의 효과이다.
쇠라의 인물들은 납작한 종이인형을 닮았다. 정면과 측면과 뒷면으로 제한된 포즈 아래에서 수평과 수직으로 배열된 사람들의 모습은 당시 파리의 댄디즘, 현대적인 생활방식을 즐기고 있는 중산층의 휴일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희미해지고 허물어진다. 그건 쇠라의 해석 때문이다.
쇠라는 원자 단위로 해체하는 분석적 의지가 바로 모더니즘의 인식 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실제모습이 상실되는 대가를 치르면서도 끝없는 분할에 집중했고, 무수한 연관관계를 발견했다. 화가로써 그는 이 사실을, 현상을 바깥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에 헌신했다.
<일요일 오후의 그랑자트 섬>은 1886년 앙데팡당전에 출품됐다. 가로 308cm, 세로 207cm인 화면은 고전주의 시대의 역사화에 버금갈 정도의 규모였고, 동시대인 인상주의자들의 어떤 그림보다도 컸다. 이 거대한 공간을 쇠라는 한치의 소홀함 없이 작은 점으로 섬세하게 구축했다. 이를 가리켜 일부 평론가들은 바글거리는 색점 밑에 리얼리티를 은폐하고 있다고 조롱했다. 과연 감추어진 걸 무얼까?
'리얼리티'... 현대미술의 수수께끼.
현대미술이 쏘아 올린 리얼리티는 물질의 실체를 파헤친다. 그러면서 나의 실존을 바라보게 하고, 더 나아가 세계의 실제를 의식하게 한다.
최소한의 기본 형태, 현대 미술의 진입로에서 만나는 이 물음은 나에게도 해당된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축약되는지, 묘사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