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정원은 센강의 작은 지류인 뤼강의 물을 도로 밑으로 끌어들여 완성됐다. 말하자면 개인 주택의 정원 연못에 물을 대기 위하여 강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이로 인하여 강 하류의 농민들이 농업용수의 부족을 겪을까 걱정한 지역 관리들은 모네의 계획에 반대했다. 하지만 모네의 성공세 덕분인지 수로 공사는 문제없이 진행됐다. 모네의 정원에는 연못이 마련되었고 수련, 붓꽃, 수양버들, 일본식 다리, 등나무 등 모네의 입맛에 맞게 꾸며졌다. 십여 명의 정원사가 채용되어 정원을 손질하였고, 모네는 집 안에서 원하는 상태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정원은 그의 밀실이 되었다.
모네의 풍경화에는 자연 예찬이 살고 있다. 모네만큼 나무와 바다와 하늘을 열심히 쫓았던 화가도 없다. 50세에 이른 그가 거대한 정원을 만들어 굳이 멀리 여행하지 않아도 시시각각 살필 수 있는 풍광을 눈앞에 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모네에게 정원은 소재를 넘어선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당시의 시인 말라르메는 "어떻게 하면 순수한 개념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명제에 몰입했다. 그는 낱말이 지닌 일상적인 의미를 넘어서기 위하여 기존의 구성을 깨뜨렸다. 종잡을 수 없는 시구가 탄생했고,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쉽게 전달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시인의 목적은 지성의 깨달음이 아니라 시구를 통하여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이 대목은 미술가들에게도 유용하다. 사물의 외관을 떠나야 한다는 신호를 알아차린 화가들은 보이는 것 외의 것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묘사하기 시작했다.
모네의 연못은 그의 역작인 <수련>의 매개체가 됐다. 이미 그는 1891년 짚단을 소재로 15장의 연작을 발표했고, 1892년에는 루앙성당의 서쪽 면이 보이는 방을 얻어 20회 이상 같은 모습을 그렸다. 연작을 통하여 모네가 말하려는 것은 물론 특별한 장면에 꽂혀서 지목하는 게 아니다. 모네는 장면을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주체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발견하는 일, 즉 자신의 주관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떤 흐름으로 전개되는지 알아차리는 일이다. 모네를 위대하게 한 건 바로 이 지점이다.
모네는 회화의 평면성에 공을 세웠다. 전경도 없고 배경도 없는 <수련>은 수면 위에 가물거리는 현상으로 채워졌다. 모네의 사색이 물에 녹았고, 색채와 형태의 관계가 남겨졌다. 훗날 추상화가들이 길어 올릴만한 기념비적인 의미가 이곳에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