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스의 창문은 요란하다. 햇빛이 얼마나 강하게 내리쬐면 이렇게 보일까? 햇살은 채도를 한계치까지 올려 어느 한 곳에 눈을 고정시킬 수 없게 한다. 어지러움은 색채의 분탕질만이 아니다. 이때다 싶은지 붓의 활동도 과감하게 동선을 드러낸다.
실내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는 건 일종의 세상 구경이다. 우리가 안전한 곳을 찾고, 안락한 상황을 계획하는 건 삶이 그다지 안전하지도 안락하지도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어떤 사건이나 상황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위안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창문이란 안전한 위치에서 자애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무심하게 또는 흥미롭게 바라보는 장소, 여기에 기대에 나는 무엇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가?
마티스의 <열린 창문-콜리우르>은 화려하다. 화분의 테라코타색과 돛대의 고동색은 진홍빛으로 반짝이고, 수면은 하늘의 빛깔이 되비쳐 분홍 물결로 출렁인다. 오른쪽 문 유리에는 왼쪽 벽이 반사되어 녹색이 나타나고, 이것은 다시 붉은 계열의 보색에 감싸인다. 여기에 화답하는 건 역할이 바뀐 반대편의 녹색 벽과 분홍의 유리창이다. 모두는 서로의 색을 대립시키며 주거니 받거니 균형을 자아낸다. 덕분에 더욱 자유로워진 건 붓의 움직임이고, 이것의 최대 수혜자는 창가의 덩굴식물이다.
이로부터 10여 년 뒤 마티스는 이와 다른 분위기의 <콜리우르를 향한 창문>을 그렸다. 오른쪽 바닥의 사선은 문이 열려 있다는 걸 알게 하고 밖의 광경은 칠흑이다. 우리는 제목을 보고 창문임을 알아차리지만 수직으로 나뉜 면 분할에 대한 궁금증을 말끔히 해소할 수 없다. 브라크가 야수파에 대하여 "우리들은 영원한 발작상태에 머물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마티스도 자신의 방만한 색채로부터 후퇴할 필요를 느꼈나 보다.
19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이지만, 마티스가 이 시대의 감정을 대변했을 리 없다. 그의 생애는 1869년부터 1954년까지로 1,2차 세계대전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학살 등을 직접 겪어야 했던 삶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함구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세상 일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조차도 싣지 않았다. 그의 화실은 세상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세상, 이곳은 창문 안의 세계이다.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이 지친 사업가에게 편안함을 주는 안락의자와 같은 효과가 있기를 원했지 어떤 교훈이나 정치적 입장이나 예술에 대한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그 덕분일까? 그는 피카소처럼 20세기 미술에 있어서 예술가로서 인생을 향유할 수 있었다. 마티스는 교육받은 부르주아만이 선구적인 예술에 호응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마티스는 영리했다. 그는 자본의 능력을 알아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