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완벽했던 그러나 금이 가기 시작한 도자기…
아직도 이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날은 결혼 전날이었는데, 정말 죽도록 피곤했던 기억이 납니다. 낮에는 늘 바쁘게 일했고 퇴근 후와 주말엔 결혼 전에 도착하신 12명의 스페인 식구들(관광단체)을 모시고 다니며 서울 관광과 통역을 하느라 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지경으로 컨디션이 다운되었습니다. 뭐 ‘혼전임신’이 자랑은 아니라 강조하고 싶지 않지만 임신 초기엔 엄청 졸리고 피곤한데 그 몸으로 결혼준비, 관광통역사, 수출팀 대리일까지… 체력이 엄청 좋았던 저였지만 제 배터리도 방전되고 말았습니다. 몸이 슬슬 신호를 보내왔지만 전 저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네요.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이 처음으로 한국에 왔는데 정말 잘해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때까진 별명이 ‘여장군’이라는 스페인 시어머님도 그냥 ‘통이 큰 여자분’ 정도로 느끼고 있었죠. 그땐 결혼 전이라 시아버님께서 ‘여장군님’이 너무 난리 치시지 않도록 중재를 하고 계셨다는 걸 몰랐기도 했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엔 제 스페인어 실력도 너무 형편없었답니다.
모든 게 바쁘고 정신없고 피곤했던 결혼 전날…. 저희는 저녁식사 후 결혼선물과 카드를 열어보고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축하카드 하나가 제 비위를 거슬렸어요. 그건 제가 1회에서 언급했던 부사장의 말에 늘 ‘하이텐션으로 웃어대던’ 여자 회계과장한테서 온 카드였죠. 뭐라 쓰여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내용은 이랬습니다.
친애하는 알론소,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내가 전에 너에게 한 말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게. 그 말은 비밀로 해줄래?
그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줘. 다시 한번 결혼을 축하하고, 둘이 잘 살기 바라.
회계과장
김 XX
WTH(What the hell?!! 더 심한 표현을 쓰고 싶지만 참습니다). 누가 결혼 축하카드에 이런 식의 말을 쓰나요?!! 진짜 이 회계과장 아줌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하게 굴었습니다. 저희 연애 초기에 부사장은 늘 하던 야근과 주말 근무를 줄이고 저와의 데이트에 열중하던 어느 일요일에 우리는 저와 부사장 또 절친한 프랑스 동료 로무앨과 같이 식사하러 가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부사장은 운전 중이라 스피커로 돌렸는데, 그건 그녀의 전화였죠. ‘알론소, 나 회사야. 회사 안 나와?’ 알론소는 얼른 얼버무리며 일요일인데 집에 가서 쉬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뜬금없이 그녀가 ‘알론소, 나한테 화났어? 요즘 나한테 너무 쌀쌀한 것 같아’라는 멘트를 날리는 게 아니겠어요? 알론소는 급하게 무슨 소리냐고 이거 차 안의 스피커폰이라고 설명하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통화 후 차 안에 엄청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그는 절대 일 외에 다른 관계가 아니라고 내 앞에서 맹세까지 하길래… 전 회계과장의 과잉 충성일 거라고 맘 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녀의 영어실력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어서 강한 스페인어 억양이 들어간 부사장의 지시사항을 이해 못 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피해는 보고자료를 준비해야 하는 아랫사람들이 보는 것이었죠. 그러다 보니 그녀는 실수를 웃음으로 때울 때가 많았고 부사장이 부탁하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해결해 주는 개인비서 같은 존재가 되어있었죠. 하지만, 저하고 연애는 비밀사내연애라 그녀가 필요하지 않아서 연락이 뜸해지자 주말에 회사까지 나와서 전화를 한 겁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전 이 분이 늘 싫었는데, 결혼카드까지 이따위로 써서 보내주시니 읽는 순간 화가 치밀었습니다.
전 당연히 이 카드의 내용이 뭐냐고 물었고, 알론소는 본인도 무슨 소린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긴 알았다고 해도 모른다고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겠지만요. 아무튼 전 그 카드를 읽고 열이 받아서 카드를 찢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알론소가 (스페인) 식구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버럭 화를 내더군요. 내가 스페인 식구들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하면서요. 네, 그건 결혼 전 날이었고 알론소가 제게 별일도 아닌 일로 화내는 걸 처음 봤고, 아마도 이 사람이 내게 보여주던 이미지는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첫날’이었습니다. 왜 결혼하면 갑자기 사람이 변하는 케이스… 그게 바로 내가 당할 일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난 거죠. 가슴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결혼식을 멈추고 싶었지만… 우리의 결혼을 어렵게 허락해 주시고 엄청난 하객을 초대하신 부모님께 더 이상의 상처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어떻게든 책임지기로 결심하고, 그날 ‘내일의 새 신부’는 화장실에서 새벽까지 펑펑 울었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