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수혁 Mar 27. 2022

점쟁이

    동전에는 앞면과 뒷면이 있고, 빛이 있으면 자연스레 그림자가 인다. 마찬가지로 모든 문제에도 그에 대응하는 답이 있기 마련이다. 삶은 우리에게 다양한 문제를 던지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깊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우리는 모두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알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같은 문제라도 사람마다 답을 그려나가는 방식이 모두 다른 만큼, 이 문답의 과정이 어쩌면 삶 그 자체일지 모르겠다.


    올해 1월, 이별을 맞닥뜨리고 나는 혼란에 빠졌다.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 몰랐고, 그 이유를 찾는다면 뭔가 달라지리라 기대하며 그 질문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질문의 대답이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으면서, 그동안의 내가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질문을 해결할 '답'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을 찾기 위해 하지 않던 일들을 시작했다. 혼자 여행이나 출사를 다녀오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등 이전의 내가 겪지 못했던 경험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에 귀 기울이려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련의 덩어리는 점점 견고해져, 모든 상황에서 함께 웃던 추억과 약속했던 미래가 떠올랐다. 나는 적당한 질문을 찾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던 중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나보다 2살 많은 동기가 나에게 물어본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지금 너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뭐야"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헤어졌다는 사실보다, 새벽마다 잠에서 깨어 홀로 헤매는 매일 밤보다, 6년 동안의 매일을 나누던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것보다, 함께 꿈꾸었던 행복한 모습이 한낱 꿈이었음을 깨닫는 것보다 날 힘들게 하는 것.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그 정체였다.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내 삶에서 더 멀어지는 것만 같아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그 희망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그리고 이 문답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막연한 이 희망을 내 일부로 받아들이고 지내던 중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추천받아 읽게 되었다. 나는 「명상록」이 집착을 포기하고, 희망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도록 이야기하는구나 생각하다가 흠칫 놀랐다. 내가 붙잡고 있는 희망이 사실 집착이 아닐까 두려워졌다. 나에겐 희망이 그 사람에겐 집착이지 않을까. 희망은 집착의 가면이 아닐까. 이런 두려움이 나를 감싸 오는 것을 느끼자 책을 덮고 천천히 생각해봤다.


    조급하게 쫓길 땐 다름없이 느껴지던 두 개념을 찬찬히 바라보니, 분명히 달랐다. 우선 둘이 비슷하다고 느낀 이유는 미래의 모습을 특정하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착은 과거를 근거로 미래의 형태를 그려나가고 싶어 했고, 희망은 현재를 근거로 미래의 형태를 그려나가고 싶어 했다. 인간을 '시체에 머무르는 불쌍한 영혼'이라고 까지 표현하며 죽음의 당위성과 절대성을 직시하는 문장이 점철된 「명상록」의 내용과 두 개념을 결부시키니 좀 더 선명한 그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그림의 구성은 '점, 선, 면'이었다.


    나의 '현재'는 광대한 우주에서, 영겁의 시간에서 찰나의 순간에 '존재'할 뿐인 '점'이다. 점은 길이도, 넓이도 차지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시간의 축에서 점은 계속해서 존재하며 연속적인 자취를 남긴다. 이 자취가 나의 '과거'라는 '선'이다. 선은 넓이는 차지하지 못하지만 길이를 가진다. 이 선은 현재 점의 위치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이 점이 어떤 자취를 남길지 선을 확신하지 못한다. 곧, 점은 선으로부터 연속적이지만 독립적이다. 그리고 이 점이 나아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면'이 나의 '미래'다. 직선이 아닌 자유형으로 흐르는 선의 경향성은 어떤 지향점을 향할 수도, 향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의 기회가 미래이고, 찰나의 점은 미래의 넓이를 향해 아주 미미하지만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


    집착이나 희망은 이 점의 위치를 미래의 특정한 형태로 이동시키려는 힘이다. 집착이 과거를 근거로 미래를 특정하려 한다는 것은, 현재의 점이 존재할 수 있는 방향을 과거의 선의 형태를 반복·답습하기 위한 폐쇄적인 경로로 제한하는 것이다. 반면 현재를 근거로 미래의 모습을 그리는 희망은, 과거의 경향성에 상관없이 내 미래의 가능성 중 특정한 위치를 향해 나아가려는 추진력이고 직선으로 이어지지 못하더라도 도달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고로 내가 재회를 바라면서 다시 가까워지지 못하는 현실에 실망하고 괴로워했던 것은 내가 쥐고 있던 정체가 집착이었음의 반증이었다. 내가 쥐고 있던 게 집착이었음을 깨끗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니 생각이 조금 정리되었다. 나를 특정한 길로만 걷도록 가둔 것은 나였다. 그렇게 걸을 수도 걷지 않을 수도 있고, 그 선과는 독립적으로 분명히 나라는 점은 존재한다.


    꽤 괜찮은 질문을 찾고 나의 답을 찾는 과정이 '점'을 치는 과정이지 않을까. 당장에 나의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서, 나의 점이 깨끗한 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해서, 쓸데없는 걱정은 관두기로 했다. 삐뚤 하면 어떻고, 조금 돌아가면 어떤가. 아름다움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나는 질문 속에서 살았고, 살아있고, 살아갈 점쟁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판단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