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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는 전부인데 나에게는 협박 카드였다

아이의 간절함을 대하는 부모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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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를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퇴사 후에 자연스럽게 소식이 뜸해졌고, 10년 가까이 지났던 터라 더욱 반가웠다. 회사에서 늘 든든하고 따뜻한 선배였기에 오랜만의 만남이 낯설기보다 오히려 편안했다. 할 이야기가 많아 며칠 후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삶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언제 이 동네로 이사 왔는지, 퇴사 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금세 아이들 이야기로 이어졌다.


선배의 첫째 아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야구를 취미 삼아 시작했는데, 중학생이 된 지금은 본격적으로 선수의 길을 꿈꾸며 훈련 중이라고 했다. 부모는 둘 다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선배는 공대를 나와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일하다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고, 아내는 간호사이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운동을 좋아하고 또 잘하는 아이가 나왔다는 사실이 신기하고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아이가 정말 원하고 즐기는 일이기에 끝까지 응원해 줄 거라는 선배의 말이었다. 아이가 어떤 길을 가든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부모로서 최대한의 지지를 보낼 생각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내 아이를 떠올리게 했고 동시에 나 자신도 되돌아보게 했다.



선배는 아이가 어릴 때 야구를 종종 협박의 수단으로 썼다고 털어놓았다.

"숙제 안 하면 야구 안 시켜줄 거야."

"말 안 들으면 야구 못 가."

가장 좋아하는 걸 미끼로 삼는 건 아마 많은 부모가 한 번쯤 써봤을 히든카드일 것이다. 아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분명할수록 그 효과는 확실하니까.


선배도 처음엔 그런 식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가 단순히 재미로 하는 수준을 넘어 야구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아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했다고. 그걸 깨닫고 난 뒤로는 야구를 걸고는 단 한 번도 협박하지 않았단다. 야구는 이제 아이에게 취미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렇게 해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여전히 그러고 있다. 아이의 간절함을 나도 모르게 조종의 수단으로 삼아왔다. 그게 얼마나 조심스럽고 경계해야 할 일이었는지 그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첫째 아이는 호불호가 분명한 아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 억지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고 정말 싫은 일 앞에서는 울음으로 강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에는 누구보다 끈질기고 끝까지 해낸다. 그 의지가 제법 단단하다.


이를 뽑은 날에도, 팔에 깁스를 한 날에도, 여행에서 막 돌아온 날에도 태권도는 빠지지 않았다. 교회에서 특별새벽기도회 때는 일주일 내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고, 부산 여행 중에도 온라인 예배를 빠뜨리지 않았다. 어린이 집회에서 찬양팀 율동을 맡았을 땐 매일 집에서 30분씩 스스로 연습했다. 누구의 강요도 없었다. 전부 아이 스스로 정하고 해낸 일이었다.


그런 아이의 노력이 늘 기특하고 대견했다. 그 마음이 예쁘다고 자주 칭찬해 주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아이의 간절함을 이용한 순간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태권도 매일 보내주니까 공부도 매일 해야지."

"피곤해서 짜증 부리면 새벽엔 안 깨운다?"

"율동 연습 안 할 거면 찬양팀 하지 마."

"힘들어서 밤마다 이럴 거면 시범단 하지 마."


효과는 있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이를 움직일 수 있었고 당장은 편했다. 하지만 선배의 말을 들은 이후로는 이 방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되었다. 아이를 얼마나 외롭게 만들었을지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인질 삼아 내 뜻대로 끌고 가려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생각해 봤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어떻게 느낄까.


"너 자꾸 아이 협박하면 내일부터 아이들 못 보게 할 거야."


그 말 한마디에 숨이 턱 막혔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말. 상상만으로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에게 전부를 빼앗는 말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아이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 주는 일, 그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응원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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