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무관심을 위한 나의 다짐
"엄마, 내일 OO 이모 만나?"
내 다이어리를 슬쩍 들여다본 아이가 물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이내 이어질 말을 예상하며 설마 했다.
"엄마, 이모 만나고 오면 '윤화(가명)는 이거 하는데 너는 안 하냐'라고 할 거지?"
그 말할 줄 알았다. 찔렸지만 인정.
"그러게. 그러면 안 되는데. 하하하. 우리 딸도 얼마나 잘하는데, 안 해야지 그럼!"
윤화는 첫째 딸과 동갑 친구다. 예전 동네에서 또래 아이 모임을 통해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엄마들끼리도 가까워졌다. 내가 서울로 이사 온 뒤에도 1년에 서너 번씩 서로의 집을 오가며 만남을 이어왔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는지, 무슨 책을 읽히는지, 반찬은 뭘 해줘야 잘 먹는지와 같은 육아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아이가 자라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교육으로 옮겨갔다. 무슨 학원을 다니는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요즘엔 거의 그런 이야기뿐이다.
윤화의 엄마는 멀리에서 대치동 학원을 보내는데 2학년에게 4학년 진도도 느리다고 했단다. 작년 가을엔 6학년 수학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배워서 얼마나 이해할까 싶다가도, 현행 진도 따라가기도 빠듯한 우리 아이를 떠올리면 할 말이 없어진다. 엄마들 이야기 속에서 돌아오는 길은 늘 착잡하다.
우리 아이는 학교 끝나면 매일 동네 친구들과 실컷 놀다 들어온다. 나는 내 교육관을 지키려 애쓴다. ‘비교는 금물, 아이의 속도에 맞추는 게 정답’이라며 마음속으로 되뇐다. 그런데 문제집 하나를 놓고 실랑이할 때면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그 말이 결국 튀어나온다.
“야, 윤화는 지금 6학년 수학 배우고 있대.”
오늘 아이가 말한 게 맞다. 또 친구 얘기할까 봐 미리 묻는 그 마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독특한 광경이 있다.
작년 가을, 우수관 한쪽에서 풀 한 포기가 자라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어 검색해 보니 '망초'였다. 아마 바로 옆에 보관해 두는 킥보드 바퀴에 씨앗이 묻어 들어온 것 같다. 흙도 없는 곳에 풀이 자라는 모습이 신기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안 죽고 잘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였다.
반년이 지나고 그 풀은 어느덧 내 무릎 높이만큼 컸다. 내가 해준 거라곤 겨울에 베란다 창문을 잘 닫아 찬 바람 덜 들어오게 한 것,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을 땐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하고 남은 물을 흘려준 게 전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성을 다해 키워보겠다며 애썼던 화분 속 식물들은 모두 시들어갔다. 물을 너무 자주 주기도 했고, 반대로 한참을 방치하다가 갑자기 듬뿍 주기도 했다. 식물에는 햇볕이 중요하단 말만 믿고 볕이 잘 드는 곳에 뒀는데, 알고 보니 그늘을 좋아하는 식물인 경우도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아는 척, 과한 관심을 줬던 건 아닐까 싶었다.
우수관의 풀은 잘 자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만 남기고 기대도 욕심도 없이 바라본 존재였다. 잊을 만하면 눈에 띄었고, 가끔 물을 흘려주면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어느새 이렇게 자란 걸 보니 어쩌면 그 비결은 ‘적당한 무관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과하지 않은 애정, 조용한 응원이 때로는 더 좋은 영양분이 되어주는가 보다.
사람과의 관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멀찌감치에서 묵묵히 바라봐 주는 마음, 잊을 만하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그런 것들이 더 오래 더 멀리 가는 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로서 가져야 할 적당한 무관심은 뭘까.
아마도 다른 아이에게 관심 끊기가 아닐까 싶다. 정확히는, 관심을 내 아이에게만 집중하는 일이라고 해야겠다.
눈을 감고 귀를 막겠다는 뜻이 아니다. 어차피 살아가다 보면 아이 이야기, 학교 이야기, 학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다. 처음엔 그렇구나 하며 넘기려 애쓰지만, 어느새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고 그 무게를 집까지 끌고 온다. 결국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를 우리 아이에게 들이민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다른 친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건 단순한 절제가 아니다. 그건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겠다는 다짐이다. 엄마로서 더 이상 나의 불안을 아이에게 떠넘기지 않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 약속이 언젠가 아이에게 ‘엄마는 늘 내 편이었어’라는 믿음으로 남아줄 거라 믿는다.
오늘 만남에서 들은 윤화는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수학 학원 시험을 봤고, 예상치 못하게 합격했단다. 꽤 어려운 문제를 푸는 곳인데도 세 시간씩 재밌게 잘하고 있다고.
다시 한번 마음이 흔들릴 뻔했지만, 이모 만나고 오면 또 친구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이의 눈빛 덕분에 오늘의 대화는 여기에 풀고 잊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