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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이 바로 너였어?!

즐거움과 조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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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오후가 되자 그쳤다. 땅이 적당히 말랐길래 간식과 줄넘기를 챙겨 둘째를 데리러 나섰다.


매주 목요일은 둘째가 학교 마치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날이다. 교문에서 엄마들이 먼저 만나고, 선생님과 함께 내려오는 아이들을 맞았다. 세 아이는 각자 엄마의 손을 잡고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참새 방앗간처럼 자연스럽게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들고, 언제나처럼 놀이터로 갔다.



중 한 명은 우리 둘째처럼 말수가 적고 쑥스러움이 많다. 처음 보는 친구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또 다른 아이는 정반대다. 애교도 많고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간다.


이모들에게 안기고 손을 잡고 재잘재잘 말도 잘한다. 가끔은 저 멀리 모르는 어른들 옆에 앉아 곤충 채집통을 자랑하고 있기도 한다. 한 번은 중학생 누나들 대여섯 명이 놀이터에 잠시 들렀는데, 혼자 그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여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어울린 적도 있다. 다른 두 아이는 멀찍이서 맴돌 뿐이었다.


아이의 엄마는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해요”라며 웃었고, 나와 다른 엄마는 그저 부럽고 신기했다.




그 엄마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놀이터에 3학년 여자아이 셋이 있었는데, 거기에 또 꼈어요. 누나들이 훈련이라면서 나무에 올라가 봐라, 놀이터 한 바퀴 뛰어라 하며 이것저것 시키더라고요. 마지막엔 돌 두 개를 주면서 다음 주까지 갈아오라고 했다고요. 아이가 그날 너무 재밌었다며, 자기는 최고의 날을 보냈다 하더라고요.”


듣고 함께 웃었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3학년 여자아이들, 훈련.. 얼핏 들어봤던 것도 같았다.

설마. 심증만 있는 채로 집에 돌아왔다. 마침 첫째가 들어오길래 물었다. 혹시 놀이터에서 1학년 남자아이랑 논 적 있느냐고.


“1학년인지는 모르겠는데, 친구들이랑 셋이서 노는데 어떤 남자애가 놀자고 해서 우리가 훈련시켰어.”


헉, 그 3학년이 너였구나.


순간 식은땀이 났다. 며칠 전 훈련이란 단어를 듣고 친구들과 놀았다는 말이겠거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게 떠올랐다.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다음부터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대하지 않도록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그 아이 엄마는 누나들을 탓하려는 게 아니었고, 아이가 유독 즐거워하길래 귀여운 에피소드처럼 들려준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몹시 미안했다.




이 이야기를 전하니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웃고 넘어갔을 일도 요즘은 조심스럽다며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었고, 지금은 사소한 행동이나 말 한마디도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누군가는 이런 일도 들려주었다. 달리기 하다 한 아이가 넘어진 줄 모르고 친구들끼리 웃으며 장난치고 있었는데, 넘어진 아이가 자신을 놀린 거라 생각해 학폭위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너랑 안 놀아”라는 말조차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가 어릴 적에 흔했던 일들이 지금은 쉽게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한편, 아이들이 이것저것 신경 써가며 놀아야 한다는 게 쓰럽기도 하다.


학폭이라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를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 그 울타리가 때론 아이들의 자유를 막는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분명 상처를 막아주는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어릴 때부터 조심하고 배워야 하는 건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비가 그쳐 놀이터에 나갈 수 있었기에 이 이야기를 들었고, 덕분에 첫째에게도 조심하라는 말을 전할 수 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세상에는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부모만 있는 건 아니니까.




며칠 뒤, 교문 앞에서 그 아이 엄마를 다시 만났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로 가는 길, 나는 조심스럽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에 머뭇거리자, 그 엄마는 오히려 “첫째가 재미있게 잘 놀아줘서 고마웠다”라며 웃어주었다. 아이에게도 “그 누나가 지니 누나래”라며 소개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부러운 눈빛으로 둘째를 바라봤다. 그런 누나가 있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침 함께 놀 친구가 없던 첫째도 놀이터에 합류했고, 셋은 훈련이 아닌 놀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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