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를 보면 결국 최고의 고수들의 대결은 아주 짧고 간결하게 끝난다. 험난한 수련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은 그곳은 무아지경의 경지인 것이다. 각종 갑옷으로 온몸을 두르고, 유명하다는 보검을 휘두르고, 기상천외한 암기를 날리는건 중간보스까지이다. 최종 보스는 대부분 그냥 평범해 보인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촌로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그 자세에는 빈틈이 없다. 겨우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서 있을뿐인데.. 한번의 휘두름으로, 눈빛으로, 한마디 말로 고수들의 싸움은 결판이 난다.
해외에 근무하고 있는 시차로 오전에는 주로 본사와 회의가 많다. 각각의 업무가 여러 담당자와 팀으로 상세하게 구분되어 있는 본사와 달리 해외법인은 그 규모가 작아서 어쩔수 없이 한 사람이 여러가지 업무를 담당해야 한다. 그 각각의 절대량은 크지 않더라도 결국 본사와 법인의 비즈니스 모델이 비슷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종류의 업무가 해외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하고, 각각의 업무는 모두 본사의 특정 부서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본사와 시간이 맞는 오전 시간에는 회의가 많다. 해외 법인의 조직내에서의 위상은 이중성을 지닌다. 사업의 규모나 특정 지역/국가를 책임지는 대표성으로 보면 본사의 꽤나 큰 하나의 사업단위로 받아 들여 진다. 그래서 본사의 큰 조직에 요구되는 여러가지 전략적인 인사이트와 고도의 관리 수준을 요구 받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결국 투입된 본사로 부터의 주재 인력은 10명이 안되는 인원으로 하나의 팀 수준이다. 각 팀에서 필요한 온갖 사소하고 디테일한 서류 작업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회사의 최고 경영진과도 회의를 하게 되고, 실무를 담당하는 팀들과도 회의를 하게 된다. 첫번째 회의에서는 책임자로, 두번째 회의에서는 실무자로, 세번째 회의에서는 지역전문가로, 네번째 회의에서는 참관자로 계속 다른 역할들이 요구 된다.
임원분들이 같이 참석하고, 팀장 등 주요 리더들이 함께 참여하는 회의는 흡사 무협지에서 자주 보던 강호의 천하제일 무도 대회? 를 떠올리게 한다. 각 문파를 대표하는 그룹들이 당주와 함께 등장한다. 문파에 따라 각각의 특징과 무공이 분명하다. 서로 치열하게 자존심을 걸고 대회에 참여해서 화려하고 시끌벅적하게 우열을 겨룬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각 문파를 대표하는 당주들이 나서는데, 장내는 일순 고요하게 가라 앉고, 초고수들의 대결이 시작된다. 경지에 오른것 같은 때로는 선문답과 같은 말과 글들이 오고 가고, 그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가며, 주고 또 받고. 결국 말과 글의 대결은 끝나고 다시 모두는 뿔뿔히 흩어져 각자의 문파로 돌아간다. 해외에서 근무 하다 보면, 직접 그 대회에 참가하기도하고, 문파의 대표자가 되기도 하고, 구경꾼이 되기도 하고, 이쪽 문파에 속했다가 저쪽 문파로 옮겨지기도 하고, 옆에 있는 장터에서 먹거리를 팔기도 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그 대회의 끝은 허무하기 일쑤다. 당장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항이 있어서, 분명히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회의를 시작했는데, 거의 대부분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다. 유일한 결론은 다음 회의 일정.
저쪽 구석에 불씨가 튀어서 연기가 폴폴 나고 있어서, 사람들을 모아서 대피해야 한다고 회의를 하자고 했는데, 정작 회의에서 누구도 정확하게 불이 났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불이 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다른 지역에 불이 나서 무슨일이 있었다 이야기 하고, 불이나서 대피하게 되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상황이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불은 아직까지는 그냥 꺼져왔다. 불합리와 모순과, 낭비가 있지만 회사의 실적은 큰 문제가 없고, 뭉개지던 업무도 어찌 어찌 해결되고, 뭐 각자들 나름대로 각 조직의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규정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내가 모든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커지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를 굳이 하나 하나 들춰가며 부각시켜서 매듭을 짓는것도 어찌보면 낭비일 수도 있다. 유일한 어려움은 내가 이 모순을 견디어 나가야 하는 것 일뿐. 나의 오전 시간을 대부분 잡아 먹는 이 회의들의 허무함을 견디어 내는 것 일뿐. 언젠가는 나도 고수의 반열에 올라서 선문답을 주고 받아야 하는데, 아직은 내공이 많이 부족하다. 아니, 애초에 이런 내공을 과연 쌓아야 하는 것인지 내적갈등이 심해진다. 그냥 강호를 떠나서 시골에 초막 짓고 살아야 할까? 강호를 떠나기에는 아직 너무 지불해야 하는 미래의 청구서들이 줄줄이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서 도와준 노인이 오래전 강호에서 자취를 감춘 은둔의 고수였으면 좋겠다. 그가 남긴 무공 비급을 얻을 수 있다면.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어느 동굴에 들어 가서 우연히 먹게된 그 버섯이 내공을 몇갑자나 늘려주는 영약이라면 좋겠다. 그런데 고수가 되면 다 괘찮아 질까? 강호의 세계는 끝이 없다던데.
비현실적인 기연을 바라기 보다 하루 하루 더디게 간신히 늘어가는 내 무공, 딱 그만큼에서 상대할 수 있는 동네 불량배 정도만 나오면 좋겠다. 간신히 늘어가는 내 월급, 딱 그만큼에서 지불할 수 있는 청구서 정도만 나오면 좋겠다. 한바퀴 휘 회사 근처 산책을 하고 오면 이제 유럽 시간에 맞춰서 오후 회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