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이 침범할 수 없는 지대
영화는 동양계 한 여성이 오른쪽에는 동양 남성과 왼쪽에는 백인으로 보이는 남성을 두고 바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세 사람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질문이 나온다. 이 질문은 불륜이지 않을까라는 관객의 선입견을 도전한다. 사실 줄거리는 남녀 불륜과는 거리가 먼 정반대의 내용이다. 영화는 유대인계 남성 아서과 결혼하여 뉴욕에서 살고 있는 한국계 여성 노라(나영)가 12살 어린시절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 오기 전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가졌던 동급생 해성을 24년만에 재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에서는 전생에 8,000번의 만남이 부부의 인연에 이르게 한다는 불교사상이 하나의 주요한 모티브이기도 하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스>는 단순히 본영화만을 반추하게 하게 하지 않고 여러 다양한 이슈들로 생각을 확장시키는 결이 풍부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몸은 아서 쪽으로 가까이 그러나 방향은 조금은 더 해성을 향해 앉은 나영
여성주의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여성주의 소설가 아니 에르노와 그녀의 작품<단순한 열정>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에서 가난한 서민계층에서 성장하여 교수라는 엘리트가 되기까지 그녀의 삶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서민층으로서의 분투가 엉켜서 작품에서 들어나기 떄문이다. 작품의 형식과 주제가 모두 여성주의 작품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열정>은 대학교수이자 작가인 주인공과 이스라엘계 남성의 불륜의 사랑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별히 줄거리라고 할 것도 없다. 소설은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라고 시작하여 불륜의 관계에서 여성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주제적인 측면에서 오롯이 여성의 성과 내면과 감각에 집중한 작품인 <단순한 열정>은 여성주의 작품으로 볼만하다
출판 당시 프랑스에서는 큰 화제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작품이 "오토픽션"이라는 장르였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은 그녀의 경험을 기반으로 쓰여진 소설이었고 이로인하여 독자들은 프랑스 사회의 엘리트인 한 여교수의 불륜이 현실이라는 것에 독자들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벨훅스는 그의 책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페미니즘이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기까지 어떤 학적인 지지와 기반의 부족으로 여성학자들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어렵게 얻은 연구실에서 대화와 인터뷰를 통해 발전해 왔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제 여성주의에 있어서 개인의 주관적 경험은 학문와 운동의 가장 주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스>는 단순한 로맨스 또는 여성주의 장르라고 볼 수는 없다.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 버린 독립영화에 속한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여성주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제적으로 여성의 내면과 감각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성 또는 문화 사회 정치적 일탈이 주를 이루는 서구의 수많은 여성주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 떄문이다. 형식에 있어서도 다른 여성주의 작품들과 동일하게 자신의 경험과 추억을 기반으로 하고는 있으면서도 그것이 여성이 입은 피해와 아픔 또는 어떤 고발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벨훅스는 자신이 지향하는 여성주의에 대해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아무도 지배받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여자와 남자가 무조건 똑같거나 평등한 곳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틀을 만드는 기준인 세상 말이다. 누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평화와 가능성의 세상에서 산다고 상상해 보라. 페미니즘 혁명만으로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인종차별과 계급 엘리트주의, 제국주의도 함께 종식해야 한다".
벨훅스는 억압받는 여성의 지위를 단순히 남녀간의 문제로 보지 않고 더 확장시켜 억압 받는 자 모두를 연대한다. 여성의 억압 상태를 좀더 큰 그림에서 보는 것이다. 인종과 한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국가간의 힘의 문제, 무엇이든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세계 전반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여성운동은 단순히 여성지위향상이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선봉에 선 깃발로서 의미가 있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성주의가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이제는 폐기처분해야 할 하나의 왜곡된 의식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이런 여성주의의 안타까운 현실에 영화<패스트 라이브스>에서 표출되는 여성은 너무 치열하기만 해온 여성운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는 측면이 있다. 바로 그것이 불교의 전생을 서구의 실존주의의 방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전생, 존중의 영역
셀린 송은 극작가 출신의 감독이고 그 역량이 영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녀의 롱테이크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이다. 롱테이크는 관찰이라는 관객의 호기심만을 낚어 영화 속에 참여하게 하는 역할만 있지는 않다. 주요한 것에 집중하게 하겠다는 작가적 호기가 롱테이크에서 들어나기도 하기 떄문이다. 센린 송은 후자와 같은 롱테이크에 대한 이해가 있는데 이는 무대라는 특성에 익숙한 그녀의 이력 때문이라 여겨진다.
남편 아서는 아내인 나영이 어린시절 연정을 가졌던 추억의 남성을 만나는 것에 어떤 감정을 느낀 것일까? 만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면 소심한 사람으로 오해를 살 것이 걱정되면서도 허락한다 하더라도 어린시절 추억의 남성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는 아내가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심각한 불륜을 저지를 것도 아니겠지만 오히려 아내의 순수한 진심이 자기를 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소외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해성과 첫만남을 하고 돌아 온 아내와 침대에서 대화를 나누는 롱테이크 장면에서 아내가 한국어로 꿈을 꾸며 잠꼬대를 할 때 무슨 말을 하는지, 꿈에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깨우지 않았던 경험을 나눈다. 그 꿈을 깨우고 싶지도 않지만 깨울 수도 없다고 말한다. 아서는 "피할 수 없는 소외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영과 아서의 집에 들어온 해성을 아서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짧지만 한국어로 인사를 하고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다. 여기서도 아서는 피할 수 없는 소외감을 느끼는데 이는 오픈닝씬에서 왠지 두 동양 남녀로부터 소외된 존재로 보여지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전달된다.
전생이라는 개념을 통한 오리앤탈리즘에 대한 정교한 비판이다. 서구의 의식과 방식대로 동양의 문화와 인격의 가치를 판단하는 서구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누군가의 전생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전생에서의 만남과 사건에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전생은 그 사람의 것으로 남기고 거리를 두는 것이 존중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자신의 경험치로 판단하여 그것이 객관적이라는 주장은 서구가 오래도록 해 온 방식이다. 여성을 남성의 입장에서, 유색인종의 자유에 대해서도 백인의 입장에서, 가난의 어려움을 부자의 관점에서, 판단하려 한다. 그저 어려움의 정도를 공감하겠다는 순수 차원을 넘어 옳고그름이라는 도덕과 윤리적 판단도 서슴치 않는다. 이렇게 오래된 서구의 교조주의에 의해 동양인을 판단해 온 것을 셀린 송은 이민 여성으로서 오래도록 경험해 왔을 것이다. 서구가 응당 느껴야 할 소외감을 피하려는 오만이다.
해성과 나영이 바에서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던 중에 해성이 아서에게 한국어로 대화해서 미안하다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한국어라는 공간에 그는 존재하지 않아 왔는데... 만약 아서가 피할 수 없는 소외감을 부정하고 "speak in English!" 라며 언성을 높혀 억지를 쓴다면, 어떻게든 그 둘 관계에 자신을 존재하게 하려 한다면 그것은 침입일 것이다. 인종과 인종간, 남녀간, 거기에는 감히 속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공간이 존재한다. 마치 남의 전생과 같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평화와 공존을 위한 존중이다.
이민자로서 그녀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한국여자로, 한국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국인이 아닌 존재로 그들의 방식대로 취급을 받았다. 이는 존재다운 존재가 되려면 어느 한 쪽으로 확실히 속해야만 한다는 강요를 받은 것과 같다. 지금까지 이민자들은 캐나다인도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정체성을 정하지 못한다는 죄의식을 경험하였다. 어디에도 구성원으로서의 온전한 권리행사가 어려웠다. 이는 단순히 합법과 불법의 법적인 상태만이 아니라 심정적인 난민이라는 내면적 고통이다.
양자역학의 쉬뢰딩거의 고양이 실험 은유는 물리역학의 "중첩"의 개념을 설명한다. 죽을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는 상자 속 고양이는 죽은 고양이 또는 살아있는 고양이인지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이런 상태의 고양이를 가리켜 "죽었거나 살아 있는 고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체성의 중첩이다. 이런 상태의 상자속 고양이는 고양이인가 아닌가? 왜 반드시 죽었거나 살아있거나를 결정해야 하는가? 그냥 그대로 죽었거나 살아 있는 고양이를 고양이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양자택일이라는 강요, 그 거짓에 속으면 실체를 알 수 없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인식 방식을 따른 공간과 시간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차원의 그 무엇이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부터의 피할 수 없는 소외감을 불편해 하지 않는 것이 존중이다. 아서가 한국어로 그들에게 가까이 가려는 노력은 어눌한 한국어를 하면 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확신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라 소외를 피할 수 없음을, 그리고 그 소외는 누구를 탓할 것도 아님을, 그럼에도 두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친절의 제스쳐라고 보여진다. 늘 아내인 나영에게 취해 온 태도일 것이다. 심지어 나영과의 첫만남에서 인연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아서는 나영에게 우리에게도 인연이 있는 것일까 질문하지만 나영으로부터 돌아 온 답은 "아니"였다. 그러나 나영은 아서와 결혼하지 않았는가. 인종, 성, 문화, 계층... 그 차이와 소외가 공존을 불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공존의 가능성은 발견된 동질이 아닌 다름에 대한 존중에 있다. 아서는 나영이 자신의 존재를 기대기에 충분한 존재이다. 그렇게 둘은 부부로 공존한다.
뉴욕을 재해석하다.
<패스트 라이브스>는 35mm 필름으로 촬영하여 서구인들에게 12살에 이민 온 한 한국여성의 이런 생소한 느낌들을 레트로의 느낌으로 담아낸 파격적인 영상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뉴욕의 이미지를 재해석하여 보여준다. 다양한 매체들은 그동안 뉴욕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기회와 기대의 공간으로, 때로는 범죄와 폭력의 공간으로 그 이미지를 구성해 왔다. 이런 서구적 긍부정의 극단적 표현들이 뉴욕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패스트 라이브스>에서는 자유의 여신상과 같은 뉴욕의 상징물이 보여지면서도 그것이 강하게 화면상 어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영과 해성이라는 인물에 집중한다. 영화는 공간을 나영의 것으로 제한하여 롱테이크로 씬을 끌어가고 에피소드를 연속해 나간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뉴욕의 풍경은 나영의 내면이다. 이런 파격적인 장면화에 비평가들이 높은 점수를 줄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이 영화에서의 뉴욕만큼은 서구인들이 인식하고 표현해 온 뉴욕은 아니다. 그런다고 나영을 뉴욕에 이방인으로 보여 주어 이방인으로서의 낯설음과 불안감과 위기감으로 나타나게 하지도 않는다. 그저 일상적이고 조금은 고요하고 그다지 큰 위험이 느껴지지 않는 도시, 나영의 도시이다. 이는 셀린 송의 서구의 것과는 다른 여성주의가 주는 주관성을 닮았다. 그렇다고 한국의 민족적 색채를 더했다는 것도 아니다. 이민 온 한국여성, 그 누구가 정하지 않고 나영만이 주관적으로 결정한 뉴욕이다. 조금은 외롭게 느껴지면서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피할 수 없는 소외감을 수용하고 있는, 그러나 자신의 소중한 삶이 의미있게 진행 중인, 자신만이 걷고 보고 다니는, 쌀쌀하지만 친근한 거리들... 뉴욕은 나영이다.
나영의 뉴욕은 비밀스럽다. 그러나 그 비밀을 어느 틀에 끼워 맞추어 무엇이라고 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호소가 들린다. 서구 또는 동양의 입장에서, 남성 또는 여성, 또는 백인과 유색인종에서 알 수 없는 다른 이의 전생과 같은 우리 각자의 삶의 공간에 대한 비밀스러움을 해체할 필요가 있을까... 해체가 본질로 가는 길일까? 나영의 뉴욕이 낯설다고 뉴욕이 아닐까? 구성된 과정을 알지 못하더라고 구성체 그대로를 완전체라고 인정하는, 변화 가능성을 포함하고 결정을 연기한 구성체를 완전체라고 인정하는, 그런 세계는 미래가 아닌 오늘, 아니 어쩌면 세상의 처음이 그러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