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내 인생이 늘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내 의지대로 하루를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지나다니는 장소, 다니는 학교, 만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온전히 ‘나’의 의지로 꾸려진 인생이 아니라, 모두가 관여하는 인생이랄까? 랜덤 재생을 하다 우연히 나온 음악에 오늘 하루를 위로받기도 하고, 별 기대 없이 간 곳에서 왠지 오래 볼 것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삶에는 다양한 우연들이 있고, 어떤 우연은 마음속 깊이 남아 인생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마치 필연인 것처럼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학교에선 방과 후 프로그램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했다.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와서 공부를 가르쳐준다고 했다. 친구와 나는 “이거 재밌어 보이는데?”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신청했고, 그렇게 나는 한 대학생 언니와 만나게 되었다.
수능에서 수학 OMR을 밀려 써서 원하던 대학에는 못 갔다는 언니. 하지만 언니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어린 나의 눈에도 멋져 보였고, 예상대로 언니는 참 멋있었다.
선생님으로서는 매 수업을 열심히 준비해왔고, 멘토로서는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 같은 언니였다. 수업이 끝나면 요새 고민은 없냐며 먼저 다가와 주고, 당시에는 꽤 심각했던(?) 고2의 귀여운 연애 고민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마지막 수업 날, 언니는 아쉽다며 학교 밖에서 맛있는 밥을 사줬고, 그렇게 우린 작별 인사를 했다. 고마웠던 나의 첫 대학생 선생님과는 그 이후로 크리스마스나 새해에 몇 번 연락을 주고받았고, 내가 고3이 되고, 재수를 하며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시간이 흘러 흘러 대학생이 된 나는, 1학년 때 가입한 봉사동아리가 사실은 친목+술 동아리였다는 것에 실망해서
(새내기는 대부분의 동아리가 그렇다는 걸 몰랐다!) 다른 봉사활동을 알아보고 있었고, 그때 그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맞다, 그게 있었지.” 바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신청을 했다.
22살의 어느 봄날, 나는 그 언니가 되어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어떤 학생들이 있을까’ 궁금증 반, ‘요즘 애들 무섭다던데... 무서운 애들이면 어쩌지..?’와 같은 떨림 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언덕을 오르는 동안, 그 언니가 문득 떠올랐던 것 같다.
다 큰 어른인 줄 알았는데, 언니도 마냥 학생이었겠구나..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날은
앞으로의 긴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이제 막 긴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렇게, 그해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