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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 "무뎌지지 않고 싶어요."

위티 평등문화위원회의 '위티 활동가의 네모' 기획연재 ⑪

  작년 평등문화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도현을 처음 만났다. 도현은 당시 입시를 준비하는 K-고등학생으로 부담이 컸을 텐데도 위티와 청소년기후행동에서 동시에 활동하면서 매사에 열심이었다. 우리는 주로 온라인 회의에서 만났기에 사담을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섹슈얼리티 세미나를 같이 하면서 활동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그가 시민사회 운동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활동가로서 하고 싶은 일이 무척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도현의 그런 에너지와 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도현은 초등학생 때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청소년기후행동 등을 거쳐 지금은 위티에서 활동하고 있다. 나는 그가 활동가라는 쉽지 않은 길을 일찍부터 걸어온 이유가 궁금했다. 도현이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왜 위티에서 활동하게 됐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인터뷰를 통해 들어봤다.


[그림] 도현의 활동 연표: 왼쪽 점부터 ‘이천십오년 부터 이천십구년 아동권리 스스로 지킴이’,  ‘이천십구년 부터 이천이십일년 청소년 기후행동&위티 회원조직 ‘스펙트럼’’, ‘이천이십일년 부터 이천이십이년 위티 집행위원회&평등문화위원회’라고 쓰여 있다. (디자인: 경하) [그림 끝]  



    1.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험”  


아고: 도현님이 처음에 사회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그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이 있었나요?

도현: 초등학생 때, ‘아동권리 스스로 지킴이’라는 프로그램에 우연히 참여하게 됐어요. 인권단체 세 곳에서 함께 운영하는 사업이었는데, 아동들이 직접 주제를 정해서 권리 옹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줬어요. 저희 조는 ‘미등록이주아동의 권리’ 관련해서 설문조사도 하고, 서명운동도 벌이고, 정책제안서도 썼었어요. 그리고 중학교 때도 같은 기관에서 아동/청소년 인권 활동을 이어서 했죠. 당시에 실무진은 전부 비청소년이었는데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저한테는 여러모로 신선했어요. 나이 불문 존댓말을 쓰고, 청소년에게 흔히 던져지는 개인적인 영역의 질문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의사결정을 할 때는 반드시 내 의견을 물어보고 진지하게 고려해주는 것… 시민사회라는 공간에 처음 진입했던 시기였는데, 나라는 사람이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낯설면서도 너무 좋았죠. 

국제아동인권센터에서 인권 담론을 접하고 활동하면서,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도 커졌어요. 모나지 않은 학생으로 적당히 말 잘 들으면서 살아가는 게 너무 답답해진 거죠. 폭력적인 상황을 겪는 게 불편해지고, 비민주적인 관계를 그냥 참고 있지만은 않게 되고. 물론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있는 상황을 지적하고 개선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내면적으로는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어요.    



    2. 청소년기후행동-함께 성장한 공간  


아고: 도현님께 청소년기후행동(이하 ‘청기행’)이란 어떤 의미로 와닿으시나요? 

도현: 청기행은 제가 초기부터 함께해 온 단체예요. 그래서 단체의 원칙과 조직구조, 목표를 세우는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고, 경험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몸으로 부딪치면서 일하는 법을 배웠어요. 공적인 이메일을 보내는 방법부터 기자들한테 전화해서 취재를 부탁하거나 집회 발언문을 쓰는 법… 그때 습득한 것들이 아직도 소중하게 느껴져요. 그런 실무를 청소년이 온전히 맡아볼 수 있는 공간, 실패해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주는 공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청기행은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제가 성장한 공간이에요.


[사진] 도현이 2019년 12월 14일 <지금 우리 함께> 집담회에서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발표 화면에 두 명의 사람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피켓 문구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 #기후를 위한 결석시위’ ‘우리는 멸종되기 싫어요 살려주세요 SOS’라고 쓰여 있다. (출처: 환경운동연합)[사진 끝]


아고: 청기행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그런 고민들이 도현님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궁금합니다.

도현: 개인적으로, 제가 청기행에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고민했던 주제는 ‘청소년’과 ‘활동가’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였어요. 저희가 했던 활동 중 하나가 기후위기 대응을 정부에 요구하기 위한 파업이었고, '기후를 위한 결석시위’라는 이름으로 열었어요. 학생들이 학교까지 빠지고 광화문에 모이니 사회적인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처음엔 내가 청소년이라는 특수성을 더욱 부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부러 교복을 입고 기자회견을 한다거나, 기후위기에 대한 우리 세대의 문제의식이 특별히 큰 이유를 설명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전략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 나이를 강조할수록 기자들은 ‘부모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냐’ ‘학교에서는 반대하지 않느냐’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지고, 언론에 ‘당찬 청소년’들이 기특하게 행동에 나섰다는 뉘앙스로 보도되기도 했어요. 내 서사가 타인의 언어로 편집되는 상황이 너무 답답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청소년혐오나 보호주의*를 좀 더 민감하게 경계하게 됐죠.   

     보호주의: 청소년운동에서 말하는 ‘보호주의’란, 청소년을 미성숙하고 약한 보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2008년 촛불집회 당시 빈번하게 등장했던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 같은 구호는 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누락하고, 동등한 시민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호주의적이다. 보호주의는 제도적인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여성 청소년을 ‘성범죄로부터 지켜주어야 할 사람’으로만 바라보면, 여성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성적 관계를 즐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놓친 채  ‘권리 보장’보다는 ‘안전 조치’에 국한된 제도만을 내놓기 쉽다.  



3. 위티-반듯하지 않은 이야기의 힘  


아고: 도현님이 위티에 오게 된 과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도현: 제가 처음 위티 사람들을 만난 건 2019년 7월 위티 창립총회 때예요. 그때 저는 위티 회원조직*인 ‘스펙트럼’(학내 청소년 퀴어 페미니즘 동아리) 부원이었어요. 우리 동아리가 소속된 상위 단체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총회에 간 거죠. 제 인생에서 첫 총회였어요. 이후에 스펙트럼 활동을 계속했는데, 위티에서 지원금도 주고 저희 활동을 홍보해주기도 했지만 사실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됐다는 느낌은 별로 못 받았어요. 저희 학교는 서울이 아니어서 위티에서 찾아온 적도 없었고, 위티의 다른 회원조직을 만날 기회도 없었으니까요. 새로 들어온 부원들은 위티에 대해서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었고, 저는 부장이었는데도 위티에 아주 큰 소속감을 느끼진 못했어요. 위티 중앙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일하는지 궁금하던 차에, 2021년 초에 제안을 받아서 (위티 평등문화위원회와 집행위원회에) 들어오게 됐어요.  

    위티는 회원들의 청소년페미니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책읽기부터 영화보기, 집회 참여하기 등 회원들이 재정 걱정 없이 다양한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한다. 현재 어린보라, 부산스쿨페미니즘연합, 이우고등학교 성 자치기구 ESC 등 총 8개의 회원조직이 함께하고 있다.    

아고: 위티에서 회원조직으로 시작하여 집행위원회(이하 ‘집행위’)와 평등문화위원회(이하 ‘평문위’)로 활동 반경을 넓혀오셨는데요, 활동하면서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 있을까요?


[사진] 김세인. (2014) 《뮤즈가 나에게 준 건 잠수병이었다》 첫 번째 스틸컷 나무가 초록을 머금은 계절, 교복을 입은 학생이 창틀에 올려진 하얀색 꽃 화분을 바라보고 있다. 두 번째 스틸컷 분홍색 침대에 입과 코를 막고 눈을 찡그려 감은 한 사람이 누워있다. (출처: 퍼플레이)[사진 끝]


도현: 집행위에서 모임을 했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뮤즈가 나에게 준 건 잠수병이었다》라는 단편영화를 보고, ‘나를 답답하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눴었어요. 가정이나 학교 내의 폭력적인 문화로 시작해서 우울, 자기혐오, 트라우마… 어두운 고백으로 가득 찬 대화였는데, 이상하게 따뜻했어요. 해방감도 느꼈고요. 저는 오랫동안 인권활동을 하면서도, 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꺼내는 데에는 늘 서투른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위티 모임을 하면서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사진] 평등문화위원회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도현, 경하, 아고, 하영이 '위티 활동가의 네모' 프로젝트 기획을 위한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출처: 위티)[사진 끝]


  그리고 저는 평등문화위원회(이하 '평문위') 활동도 기억에 남아요. 이전까지는 주로 시위, 기자회견처럼 밖으로 스피커를 향하게 해서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주로 했었기 때문에, 그런 것만이 ‘활동’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구분 지었었던 것 같아요. 근데 평문위 활동은 사실 그것과는 굉장히 결이 다르잖아요. 위티의 조직문화를 점검하고, 사안이 생기면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고, 활동가들 한 명 한 명을 인터뷰하면서 위티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외부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부를 단단하게 다지는 프로젝트를 하면서 이런 것도 활동의 중요한 한 부분이구나, 깨닫게 되었어요.


아고: 위티에서 활동하면서 아쉬웠던 적도 있으세요?

도현: 평문위나 집행위나, 우리끼리 내부적으로 하는 활동이잖아요. 이게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가 위티 밖의 사람들한테는 너무 낯설 것 같다는 생각도 자주 들어요. 지금의 정치적 환경을 고려하면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안전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것도 맞죠. 그치만 더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 페미니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고: 저는 항상 두 가지가 좀 딜레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의견은 되게 쉽게 무시되고 이런 상황이 문제잖아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사회가 우리 목소리를 들어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어른들은 ‘원래 사회는 이런 곳이야, 이런 사회에 (청소년인 너희가) 적응해야지’라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물론 청소년인권 운동은 누구나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지만, 집회나 언론사 인터뷰를 하는 등 어떤 순간에는 내 의견이 정치적으로 좀 먹힐 만하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도현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도현: 우리의 목소리를 듣게 하려면 전략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청소년기후행동에서 활동하면서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 임팩트 있는 퍼포먼스를 하거나 집회를 특이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법을 많이 익혔거든요. 물론 그거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닌, 남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사이에서도 균형을 찾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진정성과 핵심적인 메시지를 희생시키지만 않는다면, 우리와 조금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해서 후퇴하는 건 아니죠.


아고: 오, 뭔가 앞에서 말씀하셨던 ‘청소년’과 ‘활동가’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 고민하셨다는 얘기와 연결되는 지점도 있네요.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신 것 같아요. 그러면 위티를 만나고 나서 도현 님의 삶에 생긴 변화가 있을까요?

도현: 위티 중심부에서 활동하고 나서 달라진 건 내부적이고 조직 문화를 다지는 활동도 되게 활동의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걸 알게 된 게 좀 달라졌고요, 위티를 만나면서, ‘정상적’이지 않은, 사회적 틀에 들어맞지 않는 나의 욕망을 긍정하게 됐어요. 제가 위티에 크게 끌렸던 이유이기도 한데요, 사실 위티는 시민사회 내에서도 특별히 날카롭고 논쟁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의제강간 제도가 이슈가 됐을 때도, 대부분의 단체는 아동 성착취 예방을 위해  의제강간 연령 하향을 주장했다면 위티는 그러기 이전에 ‘연령을 기준으로 ‘동의 능력’을 획일적으로 정할 수 있나?’ ‘의제강간 제도가 청소년의 성적 실천을 억압하지는 않을까?’ 같은 질문을 먼저 던졌잖아요.* 그동안 사회적으로 잘 들리지 않았던 이야기였지만, 저에게는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저의 경험 내지는 의문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위티의 담론을 접하면서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연애’ 이런 첨예한 주제에 대해서 주변 친구와도 이야기해 보게 되었어요.  

    위티 의제강간 연령 논평 전문 :   https://wetee.kr/24/?q=YToyOntzOjQ6InBhZ2UiO2k6Mj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3782850&t=board&category=5ls3hwu02s

[사진] 강물에 빛이 반사되어 빛나고 있다.   


3. “무뎌지지 않고 싶어요”


아고: 이제 도현님, 곧 있으면 비청소년이 되시잖아요. 기대감이나 걱정되는 것들도 있으세요?  

    인터뷰는 2021년 겨울에 진행되었다.  

도현: 나이가 더 들고 나서도 청소년운동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동시에, 청소년인권운동의 특징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거쳐 간 시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에 둔감해지는 사람이 많다는 거잖아요. 나도 이미 거쳐 갔기 때문에 다 알고 있고 크면 나아지고 이런 식의 논리들을 펴는 비청소년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 걸 보면, 나이가 들어도 무뎌지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서 뭐 학교 안에 문화라든가 그런 것도 계속 변하잖아요. 청소년들이 가장 크게 당면하는 문제 혹은 가장 폭력적이라고 느끼는 경험은 계속 바뀔 텐데, 내가 청소년기를 경험했고 그때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고 해서 내가 계속 마이크를 쥐어도 되나, 하는 고민이 좀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청소년 동료들과의 연결고리를 계속 유지하고 이야기를 들으려는 노력이 좀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비청소년이 된 다음에는 청소년인권활동을 못 한다, 이게 아니라 들으려는 노력, 그리고 필요할 때는 마이크를 넘기는 노력이 좀 더 많이 필요해질 것이다, 라고 생각해요.   



    4.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아고: 도현님에게 ‘활동’이라는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도현: 단순하게 말하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겠죠. ‘운동’이라고도 부르고 ‘활동’이라고도 부르지만, 저는 후자를 좀 더 선호해요. ‘운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머리에 띠 두르고 길거리에서 ‘데모’하는 단일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활동은 앞에서 말한 시위일 수도 있고, 교육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고… 다양한 방식과 형태의 활동이 있는 만큼, 꼭 시민단체에서 상근자로 일해야지 활동가인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저 자신한테는 좀 다른 잣대를 들이댔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활동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저를 활동가라고 부를 생각을 전혀 못 했거든요. 오히려 뭔가 ‘스케일’이 큰 실무를 맡고 나서야 저를 활동가로 인지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잣대에서 아직은 조금 자유롭지 않지만, 그래도 좀 다양한 방식의 활동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고: 그러게요... 활동가라는 단어에서 오는 무게감 같은 것일까요.

도현: 그 무게도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활동가라고 하면, 되게 완벽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잖아요. 예를 들어서 내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발언을 실수로 했다든지, 완벽한 비건이 아니라든지… 그러면 활동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압박을 느꼈던 순간들이 많아요. 사람을 ‘활동가’와 ‘활동가가 아닌 사람’으로 엄격하게 나누면 그런 한계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활동가’라는 이름을 좀 가볍게 쓸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해요. 완벽하고 대단한 사람 아니어도 활동가일 수 있다는 것. 하나의 ‘상’이 아니라, ‘지향’이자 ‘정체성’이면 좋겠어요.


[사진] 도현이 2021년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벌였던 '차별금지법 제정하자!' 10만행동에 동참하며 찍은 사진. ‘차별금지법 제정하라’고 쓰여 있는 피켓을 두 손으로 들고 서 있다. (도현 제공)[사진 끝]


아고: 최근에 도현님의 관심 분야가 뭔가요? 진로나 활동에 연관된 것이 아니더라도 도현님이 관심 있어 하는 분야가 있나요?

도현: 제가 관심 있는 분야는 결과적으로 ‘청소년이 목소리 낼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그럴 수 있는 공간을 찾으려고 이런저런 단체에 계속 기웃거리다 운 좋게 기회를 얻었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훨씬 많잖아요. 예를 들어 제 학교 친구들만 해도 ‘시민사회’라는 공간이나 ‘활동가’라는 이름을 되게 낯설게 생각하는 것 같거든요. 그 장벽이 좀 낮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위티 안에서의 저의 위치성을 계속 생각하게 돼요. 저는 쭉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처음 위티에 들어왔을 때 다른 멤버들과 관점이 되게 다르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고, 학벌주의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제가 가지는 특권에 대해 죄책감을 많이 느끼던 시기도 있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저의 삶의 배경과 상관없이 위티에서 환대받는다는 느낌을 받았고요. 그리고 그런 활동가들 관점의 차이나 배경의 차이가 다양성을 더해준다는 느낌이 오히려 많이 드는 것 같아요. 위티 안의 구성원들도 다 다르잖아요. 근데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시점에 다다랐어요. 예를 들어서 저는 대안학교 내의 문제점이나 탈학교 청소년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당사자만큼 잘 알 수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공교육의 문제점이나 학교 내의 폭력적인 문화를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 같이 공존하는 게 오히려 더 좋다,라고 느낌이 들어요. 그 차이를 없는 것처럼 눙치지 않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권과 소수자성을 똑바로 응시하고 싶어요.




  자신의 활동에 확신을 가지고 지나온 궤적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말하는 도현의 모습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활동에 대한 그의 진심을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얼마 간은 도현의 ‘무뎌지고 싶지 않다’는 말이 머릿 속에 남았다. 그 말이 어떠한 순간에도 고여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으로 들리기도 했다. 앞으로 세상을 똑바로 마주보며 뚜벅뚜벅 걸어갈 도현의 행보가 기대된다. 



P.S 도현의 편지 

활동가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하자면 ‘활동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슬픔이 기쁨을 압도해버리면 즐거움 없이 의무감으로만 활동하게 되고, 또 기쁨만 알면 활동하는 공간 내부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목표를 쉽게 달성하지 못했을 때 쉽게 좌절하게 되잖아요. 저는 이런저런 활동을 해 온 지 3-4년이 지난 이제서야 그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그동안 내가 어땠는지 들여다보고 있어요. 활동하면서 드는 다양한 감정에 대해서 고민하고 동료들과 터놓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저에게도, 다른 활동가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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