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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 "같이 만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때"

위티 평등문화위원회의 '위티 활동가의 네모' 기획연재 ⑫

  ‘안녕 국회’ 프로젝트에서 하영을 처음 만난 날, 내가 하영과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싫어했던 교사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대화를 시작했는데, 그 후로 이어진 이야기에도 너무나 말이 잘 통해 우리는 금세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하영은 2019년 말에 위티를 처음 찾았다. 초반에는 콘돔전시회, ‘안녕 국회’, ‘경계넘기’ 등의 프로젝트를 위주로, 2021년부터는 운영위원회와 평등문화위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위치에서 꾸준히 위티에 마음을 다해온 하영은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하고 지냈을까? 또 위티는, 활동은 하영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안녕 국회’: 청년 여성 정치인과 청소년 활동가가 만나 섹슈얼리티, 스쿨미투, 주거권 등을 주제로 대담을 나눈 총선 기획.  
    ‘경계넘기’: 1020 페미니스트 교육활동가 양성 프로젝트.   



1. “재미있었어”


경하: 하영은 위티를 어떻게 알게 됐어? 어쩌다 여기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건지 궁금해. 

하영: 특별한 계기가 딱 있었다기보다는… 내가 학교에서 단톡방 성희롱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몇 명이서 (대응을) 준비하는 과정이 외로웠어. 많이 헤매기도 했고 서로 의견이 안 맞기도 했고. 근데 그런 상황에서 기자회견 같이 이런저런 자리에 불려 다니게 된 거야. 그 중 한 번, 위티가 오지는 않았지만 스쿨미투와 관련된 행사에 간 적이 있어. 내가 거기서 말을 하다가 엄청 울었어.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느낌이 되게 이상했고, 뭔가를 말하기가 어려운 마음이 들었어.

  그러다 보니 내 안에서 풀어내지 못한 언어를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하나는 들었고. 단톡방 성희롱 고발과 스쿨미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비슷하지만 다른 결의 두 사건이 ‘학교’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과 관련하여 문제의식을 느끼기도 했어.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가 경험한 학교 안에서는 '예비교사'가 성희롱을 했다는 것이 문제시되었는데, 그와 반대로 스쿨미투에서는 ‘교사’가 가진 권력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스쿨미투에 관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위티에 연락을 해봤어. 한 번 만나볼 수 있겠냐고. 근데 사실 위티가 바빠서 글 마감일이 지나고 나서 지혜(당시의 공동 대표)를 만났고, 캐주얼한 대화를 나누게 됐지. 그러다가 지혜가 콘돔전시회를 같이 준비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는데, 재밌을 것 같았어. 콘돔을 가지고 전시를 한다는 것이 좀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었거든. 동시에 청소년 당사자가 아닌 내가 이걸 해도 되나 싶은 마음도 있었어. 그렇지만 재미있어 보이니까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었어. (웃음) 한편으론 위티에서 직접 활동하며 (썼던 글을) 연구로 좀 더 발전시켜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어. 그래서 연구자 아닌 연구자, 활동가 아닌 활동가의 이상한 위치로 시작한 것 같아.


경하: 해보니 어땠어, 재밌었어?

하영: 우선 진짜 재밌긴 했어. 왜냐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영화나 책을 같이 보고 얘기를 나눴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듣거나, 내 섹슈얼리티에 대해 막 솔직하게 말해본 경험이 이전에는 별로 없었거든. 내 안에 있었던 금기를 깨는 느낌이 좋았어. 콘돔전시회 자체도 좋았지만, 그 전에 준비위원회가 만나는 시간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혹은 어떤 매체를 이용하고 싶은지, 이런 것에 대한 얘기도 많이 했고. 포스트잇으로 공간 배치를 미리 해본다든가 하는 작업들도 재미있었어.


(사진) 콘돔전시준비위원회 모임 테이블 사진. 책상 위에 글이 인쇄된 종이가 놓여있고, 곳곳에 형광펜과 포스트잇으로 코멘트가 남겨져 있다. (사진 끝)


  나는 2020년 초까지는 되게 재미있었던 것 같아. 위티에서 하는 기획들이 크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흥미로웠어. 예를 들면 콘돔전시회 때는 전시회장을 큰 걸 빌릴 수도 없었고, ‘안녕 국회’도 예산이 넉넉한 프로젝트도 아니었고. 하지만 이렇게 작은 단체에서 뭔가를 꾸준히 만들어내고 ‘스쿨미투 이후’를 새롭게 상상해본다는 점은 재밌었지. 그리고 사실 많은 단체들이 정책 수립이나 법 제정을 목표로 활동을 하거나, 어떤 제도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을 택하잖아. 위티가 그런 일도 하고 있긴 하지만, (예술 프로젝트 같은,) 그렇지 않은 방식을 고민하는 게 나한테는 좀 재미있었어.


(사진) 하영의 콘돔전시회 작품 사진. 조명이 비춰진 벽에 어두운 변기 입구의 사진 한 장과 글 한 장이 나란히 붙어 있다. 글에는 “아주 차가운 곳에 알몸으로 덩그러니 놓인 것만 같았다. (...) 사랑의 기운이 하나도 없고 바닥엔 먼지가 가득했던 그곳에서(...) 딱딱한 바닥이었고, 너무 추웠다고 기억합니다. (...) 몸까지 더러워지는 기분. 공간이 더러워서 안전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 콘돔을 마땅히 버릴 데가 없다.” 등의 문장이 적혀 있다. (사진 끝)



2. 평등문화위원회를 만들며


경하: 하영이 ‘재밌었다’고 말한 2020년 초 이후에, 경계넘기와 평등문화 TF(위티 평등문화위원회 준비 모임으로, 당사자성, 반성폭력, 지속가능성 등 총 4개의 주제로 세미나와 토론회를 운영함, �더 알아보기)가 있었지. 내가 TF에는 참여하지 않았어서, 그 모임이 어땠는지 특히 궁금했어. 

하영: 나는 TF가 내 경험을 다시 해석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 당시에 활동가들 사이에서 자주 이야기되던 당사자성 이슈라든지, 우리가 늘 운동에서 고민해 왔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 깊게 고민할 수 있었고. 내 마음 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던 생각들이 구체적인 주제들로 다시 호명된 것이, 내 경험들을 새롭게 해석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줬다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나는 위티에서 활동을 시작할 때 나는 내가 비청소년이고, 연구자도 활동가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이 어려웠어. 그리고 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는 내가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있다는 걸 느꼈는데, 이게 내가 그동안 비판해온 (제도권의 성과중심주의적인) 환경들과 거리가 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그래서 내가 위티에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할 지 고민이 되었지. 그럴 때 평등문화 TF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도움이 됐어. 내 고민을 복합적으로 볼 수 있었거든. 가령 예전엔 내가 비청소년이니까 늘 한발짝 물러서야 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구나 깨닫기도 하고.


(사진) 평등문화 TF가 진행한 수다회에서 발표를 하고 있는 하영. 하영은 오른쪽에 놓인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다. 왼쪽의 텔레비전 화면에는 “전문가, 비청소년, 정치적 주체”와 “당사자, 피해자, 청소년, 미성숙”이 노란색 양방향 화살표의 양쪽에 구분되어 적혀있다.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는 노란 머리의 참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사진 끝)


경하: 그렇구나, 그러면 TF에서 평등문화위원회로 넘어오는 시기는 어땠어? 

하영: TF까지는 잘 마무리를 했고, 이후엔 암흑기였어. 이 시기가 나한테 너무 힘들었던 게… 단체 내에 여러 평등문화 침해 사안들이 생기면서 평등문화 관련 실무가 많아졌고, 동시에 평등문화TF가 평등문화위원회로 바뀌면서 독립적인 기구가 되어서, 총회 전에 위원회 정관이랑 세칙을 다 만들었어야 했어. (�평등문화위원회 소개 보러가기)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내가 졸업을 준비해야 했고, 연구 보고서 마감일도 다가오고 있었고, 참여하는 외부 프로젝트도 있었어. 그런 일들이 2020년 하반기에 쫙 있었지. 그때 내 삶이 소용돌이에 들어갔고 다시 빠져나오는 데 좀 시간이 걸렸어. 

경하: 근데 그때는 몰랐어?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기가 정말 말도 안 되잖아.

하영: 말도 안 되지.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난 할 일이 너무 많아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정 정리를 아예 안 하고 앞에 보이는대로 일을 처리하거든. 그래서 그때는 잘 몰랐어. 


경하: 그때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어?

하영: 그때 그만두고 싶었던 건… 정확히 말하면 단체 내의 평등문화 침해 사안에 대응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것 같아. 당시에는 (평등문화)위원회가 존재하지 않았어서, 개별 활동가가 급하게 대책위원회를 만들어서 대응을 해야 했으니까 힘든 점들이 있었지. 아무리 논의를 해도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대충 알고 있기도 했고. 이미 떠나버린 사람도 있어서, 문제와 관련된 누군가가 없는 상황에서 이야기들이 이어졌고... 그런데 이렇게 나도 프로젝트도 단체도 힘이 없는 상황에서 사안 처리를 끝까지 하는 것의 의미를 못 찾겠는 거야. 머리로는 이렇게라도 해야 된다는 걸 알아. 누군가는 떠났더라도, 내부에서라도 이 사안에 대한 합의를 계속해서 만들어야 된다는 걸 아는데… 깊게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것들은 변화하지 않았어. 그런 걸 보는 게 힘들었고 그래서 사안 처리를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경하: 너무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 그럼 지금의 평등문화위원회는 어떤 것 같아?

하영: 지금은 난 좋아.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인터뷰 프로젝트가, 위티가 한창 잘 되는 동안 이 안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활동을 했는지 들여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하나 있고. 두 번째로는… 우리가 너무 힘들게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그동안의 시간이 가진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 그러니까, 어떤 어려움이나 고민이 있을 때 그걸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도 방법이지만, 좀 돌아돌아 생각해볼 수도 있잖아. 여러 시기를 거치며 마음이 변화하고 복잡해지니까 그걸 말끔히 정리하기 어렵기도 하고.

경하: 맞아 나도 공감해.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적당히 돌아보고 적당히 의미 부여할 수 있는. (웃음)



3. 위티의 매력은-

경하: 하영을 위티에 남아있게 하는 이곳의 매력은 뭐야?

하영: 위티의 매력…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페미니즘’은 나에게 나름 익숙한 것이었지만, 청소년 운동은 나한테 비교적 생소한 일이었어. 위티에 와서야 청소년 의제에 대한 고민과 깨달음을 많이 얻었지. 그리고 내가 나온 학교의 특성상 20대가 되자마자 갑자기 사람들이 나를 예비 교사라고 불렀거든. 그렇게 호명을 받는 일이 나의 20대와 10대를 단절시켰고, 내가 학생으로서, 청소년으로서 살았던 시기를 쉽게 잊게 만들었어. 그러면서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던, 오랫동안 묵혀놨던 고민과 마음들을 위티에서 활동을 하며 푸는 느낌이었어. 특히 2020년 초반에는 그랬지. 또 위티에서는 청소년 페미니즘이라는 의제를 고민하면서 섹슈얼리티라든가 주거권 같은 다른 많은 영역들을 함께 다루잖아. 그게 나에게는 어떤 문제를 한 영역으로만 한정지어서 생각하지 않는 좋은 연습이 됐던 것 같아. 그런 점이 나에게는 큰 동력이자 상상력이 되었어.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했어. 


(사진) 어린이날 맞이 기호0번 청소년 후보 출마 기자회견에 참석한 유경과 하영. 빨강과 파랑색 소라 모형 조형물 앞에 유경과 하영이 피켓을 들고 나란히 서있다. 유경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초록 배경에 노란 글씨로 “어린사람이 ‘아랫사람’이 아닌 사회, 차별금지법으로 만들겠습니다! 기호 0번 청소년”이 적혀있다. 하영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하얀 배경에 연두색 네모가 그려져있고, 그 앞에 말하고 있는 청소년이 캐릭터화 되어 그려져있다. 그림 위아래로 각각 “청소년의 말할 자리를 내놓아라!”, “기호 0번 청소년”이 적혀 있다. (사진 끝)


  한편으로는 관계적인 측면도 중요했던 것 같아. 내가 그동안 몸담았던 공간들은 성과중심적인 곳이 되게 많았어. 어떤 프로젝트를 할 때도 그냥 그 일만 끝나면 쉽게 깨져버리는 멤버십이 많았고, 사람들은 별로지만 일을 끝내야 하니 어떻게든 끌고 갔던 관계들도 있었지. 그런데 위티에서 하는 일들은, 성과가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잖아. 그래서 동료이자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관계들에 대한 가능성이 보여서 좋았어. 위티 안에서 그런 관계들을 더 만들어 가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 



4. “우리가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경하: 하영은 하영이 활동가라고 생각해?

하영: 2020년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21년에는 그랬던 것 같아.

경하: 그럼 활동인지 아닌지의 기준은 뭐야?

하영: 음… 20년까지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나 일하는 방식이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자원을 바탕으로 한다는 죄책감을 느껴서 나를 활동가라고 여기는 게 어려웠어. 그래서 2020년에 여러가지 시도를 해보기도 했는데 그게 다 나와 딱 맞는 일들이 아니었어. 그리고 2020년에 했던 일들은 주로 내가 어떤 걸 제안해서 한 일이라기보다는 보조를 하거나 이미 기획된 내용을 따라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하는 활동의 의미를 그때그때 찾아내기가 어려웠어. 그러다 21년에는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방식을 찾는 게 아닐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고, 섹슈얼리티 세미나 같은 걸 주도적으로 진행해 보면서 내가 같이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때 그나마 좀 나를 활동가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경하: 그럼 2020년에 하영이 생각한 활동가라는 건 뭐였어?

하영: 2020년에 내가 생각한 활동가? 위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

경하: 위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 하영이 위티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영: 응. 그리고 그때 사무처에 3명이 있었잖아. 그 셋이 실제로 일을 되게 많이 하기도 했고, 그 사람들이 중심 활동가라고 느껴졌지.

경하: 그럼 하영이 지금 생각하기에 활동가는 뭐야? 혹은 활동은 뭐야?

하영: 그동안 위티 활동을 하며 느낀 것은… 우리가 다들 청소년 페미니즘에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거기서 가지치기 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는 것이었어. 예를 들어 누군가는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는 학교라는 공간에 계속 연결을 하고… 이 논의를 의미화하는 방식이나 목표하는 지점이 다 다르다는 것을 2020년 하반기쯤에 가서 완전하게 깨달았어. 우리가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그동안 다양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활동이라고 하는 건… 다른 단체에선 모르겠지만 위티에서는, ‘청소년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자기의 언어로 해석하고, 위티에서 같이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때? 그게 활동일 수 있는 것 같아.




  하영을 알게 된 지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이 체감될만큼, 변화하는 마음들과 촘촘한 이야기로 가득한 인터뷰였다. 하영 역시 그간 해온 활동들 속에서 해방감, 뿌듯함, 어려움, 가능성과 한계 등을 모두 발견하는 것 같았다. 위티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하영 나름의 방식대로, 열심히 일하고 또 그만큼 나누며, 쉬이 요약되지 않는 시간을 묵묵히 지나온 하영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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