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티 평등문화위원회의 '위티 활동가의 네모' 기획연재 ⑥
2019년 여름, 위티 창립총회에 갔었다. 강의실처럼 생긴, 그리 화려하지 않은 공간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는데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는 무심코 학교 수업이라 여겼을 수도 있겠다. 참여자의 대부분이 십대 청소년이었으니까. ‘정관’은 뭐고, ‘의사정족수’는 또 뭔지. 총회 내내 어려운 한자어들이 끊이지 않고 등장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리저리 자료집을 들춰보고 끈질기게 손 들며 각자의 고민과 제안을 나눴다.
그날 창립총회의 의장을 맡은 사람이 바로 지혜였다. 지혜는 청년정치공동체 너머(구 청년좌파)에 소속된 채로 위티의 전신인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이하 청페모)’를 꾸렸고, 여기서 만난 동료들과 스쿨미투 운동을 하다 2019년에 ‘위티’를 함께 창립했다. 그는 첫 해에는 공동대표, 그 이듬해엔 사무처장을 맡으며 위티의 중심을 든든하게 지켜왔다. 인터넷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여러 기사들이 쏟아지지만, 이번 인터뷰는 좀 더 솔직하다. 지혜가 지금껏 해 온 활동의 비하인드 스토리라고나 할까. 그가 통과한 시간에 대해 차근차근 들어보았다.
[사진] 위티 창립총회가 열렸던 강의실 앞쪽에서 지혜가 마이크를 쥐고 서서 사회를 보고 있다. 지혜 등 뒤에 있는 흰 바탕의 스크린에는 ‘우리의 말하기가 계속되도록’이라는 창립총회 제목이 적혀 있다. 지혜 앞의 책상에는 노트북과 의사봉이 놓여 있다. [사진 끝]
도현: 사회운동을 처음 시작한 계기는 뭐였어요?
지혜: 2013년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는 운동이 있었잖아요. 그걸 보면서 '아, 나도 대자보를 써서 붙여야겠다'라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어요. 근데 대자보를 쓰고 나서 붙이기까지 무섭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결국엔 교감실 불려가서 ‘왜 이걸 붙였냐’ 이런 질문들을 들었는데, 그 때의 두려움이 계기가 됐어요. ‘이게 왜 두려워야 하나.’ 사실 이전까지는 '내가 필요하면 목소리를 낼 수 있겠지. 근데 나 지금 별로 목소리 내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내가 ‘이런 얘기를 해볼까’ 마음 먹었을 때 학교에는 내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정말 없구나, 알게 됐죠.
도현: 당시에 학교에 붙이신 대자보는 어떤 내용이었는지 궁금해요.
지혜: 그건 밀양 송전탑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저한테는 밀양 송전탑 투쟁의 장면들이 되게 큰 충격이었거든요. 산을 오르려고 하는 주민들이 있고, (경찰이) 물리력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사람들이 고립되고… 그게 너무 비상식적으로 느껴졌고, 내 삶과 격리된 채 ‘어딘가에 있었던’ 현실에 처음으로 끌려들어갔던 시점이에요.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인간보다 이윤을 더 중요시하는 사회, 청소년에게 어른 말만 잘 듣고 가만히 있으라고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고민을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하게 됐어요.
도현: 밀양 투쟁, 세월호 참사 등 여러 사회이슈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지금 위티에서 집중하고 있는 주제인 ‘청소년인권/페미니즘’으로 이어진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지혜: 제가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이 큰 영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내가 대학생이었다면 대자보를 붙이는 게 이만큼 무서웠을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또, 저한테는 일상복이었던 교복을 입고 그냥 하교하면서 집회에 갔을 때 사람들이 동의 없이 내 손을 잡고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던 기억, 혹은 이런 활동을 하는 나를 보고 기특해하거나 반말을 하는 사람들을 경험했던 기억…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올 때 이 사람들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로 존중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처럼 하나의 청소년인권 의제에 집중하기보다 청소년 동료들‘과’ 밀양을 말하고 싶고 세월호를 말하고 싶고 국정교과서에 대해 항의하고 싶고 민중총궐기 같이 나가고 싶고, 이런 식의 활동을 해 왔어요. 그런 흐름에서 청소년 페미니즘이라는 것도 연결돼 있었던 것 같아요.
2016년에 페미니즘 리부트/대중화 흐름이 있었을 때 (20, 30대) '청년 여성'들에게 되게 집중돼서 등장을 했었잖아요. 그 속에서 저, 여성이자 청소년으로서 겪는 복합적인 차별에 대해 같이 담론을 만들어 갈 동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전에도 '청소년의 의제는 이걸로 정해져 있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고 그냥 그때그때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을 청소년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뤄야 되는지 고민해 왔기 때문에 저한테는 ‘청소년 페미니즘’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 시기에.
[사진] 지혜가 흰 종이를 두 손으로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종이에는 ‘학교 안의 여성혐오에 맞서 싸웁시다. 해시태그 나는 청소년 페미니스트다’라고 적혀 있다. [사진 끝]
그렇게 ‘청페모’가 꾸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곳은 마음 맞는 동료들을 필요로 하는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공동체가 되었다. 이들은 ‘의제강간’처럼 청소년인권과 페미니즘이 교차하는 주제로 토론을 하고 책을 읽었다. 2017년에는 <페미:나>라는 이름의 1박 2일 캠프를 열었는데, 청소년 참여자들이 “폭력에 가까웠던 섹스 혹은 죄책감으로 남았던 자위 경험을 툭 털어놓을 수 있는 자리”였다.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다가 어떤 이가 “울거나 말을 잘 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5분이고 10분이고 그냥 기다리며 끝까지 들어주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지혜는 ‘안전한 공간’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는 이후 그가 위티를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는다.
[사진] <페미:나> 캠프에 참여한 30여 명의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찍은 단체 사진. 모두 한 손으로 주먹을 쥐며 ‘파이팅’ 자세를 취하고 있고, 맨 앞줄의 사람들은 보라색 플래카드를 나눠 들고 있다. 플래카드에는 캠프에서 진행되었던 모든 프로그램의 제목이 적혀 있다. 제목을 순서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생각지도 ‘페미:나’, 신년맞이 집담회 ‘내 나이가 어때서’, 비정상가족 연극, Born This Way,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진짜 성교육, 포에트리 슬램 ‘페미니스트:나’, 청소년 페미니스트 선언. [사진 끝]
도현: 청페모가 위티 창립으로 이어지고 나서 가장 크게 바뀐 점은 무엇이었나요?
지혜: ‘청소년 페미니즘적 가치가 담긴 공간’이라는 걸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시도해 봤다고 생각해요. 위티에서는 늘 새로 온 사람들이 되게 중요한 일들을 같이 맡고, 그 속에서 어렵고 힘들지만 많이 성장했어요. (활동가 중 한 명인) 유경 님도 2018년 하반기에 들어와서 2019년 중반에 대표를 맡았거든요. 가변성이 심한 조직, 유동적인 조직, 열려 있는 조직…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고 누구든 활동가가 될 수 있는 그런 구조를 만들어보고, 청소년 페미니즘 운동을 하면서 내가 상상했던 단체 운영 방식을 많이 시도해 봤던 게 변화였어요.
도현: 그럼 위티에서 활동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뭐에요?
지혜: 늘 대외적인 답변은 따로 있지만 여기는 그런 자리가 아니니까… (웃음) 사람들과 시행착오를 겪었던 시간이 좋았던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콘돔전시회 준비위원회 멤버들이 전시회 하루 전까지 작품을 만들고 있는 걸 그냥 묵묵히 바라보기. (웃음) 내가 실무에서 손을 놓고 그냥 사람들을 믿었을 때 그 사람들이 되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해냈던 경험들이 저에게 좀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왜냐면 예전에는 제가 다 확인하고 싶어했었거든요. 되게 개입하고 싶어 했고. 근데 단체가 크니까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는 거에요. ‘이건 네가 해야 되는 거고, 네가 못하면 망하는 거고, 그럼 그냥 우리 같이 망하고 다시 시작해야 되는 거고.’ (웃음) 이런 일들이 많았죠.
콘돔전시회: 위티와 자색고구미 팀에서 함께 주최한 예술 전시회. 전시의 풀 네임은 ‘힐난도 자랑도 수치도 아닌 콘돔전시회’이다. 콘돔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청소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다양한 메시지를 담았다.
전시 후기 보러 가기
[사진] 빨간 체크무늬 돗자리 위에 콘돔전시회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이리저리 놓여 있다. 다양한 색깔의 반짝이 가루가 든 병들, 연두색 콘돔 껍질, 바람을 넣어서 입구를 묶은 콘돔 등이다. 그 재료들 사이로 위티 활동가들의 손이 바삐 오가고 있다. [사진 끝]
그리고, 우리는 욕심을 많이 내서 기획을 하고 그걸 끝까지 마치려고 했던 조직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작년에 했었던 작업들 중에서는 ‘안녕 국회’ 영상 시리즈가 생각 나는데, 멤버 3명이서 영상을 5개 낼 생각을 하고… (웃음)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지도 모르고 그냥 하고 싶은 것을 대책 없이 많이 했던 그런 시간들이 기억에 남아요. ‘경계넘기’ 프로젝트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단체에 처음 온 사람들이랑 같이 교육안을 만들겠다는 것 자체가 사실 되게 하기 어려운 생각이었네, 싶죠.
안녕 국회: 위티의 2020년 총선 대응 프로젝트로, 총선에 출마한 청년 여성 후보들과 위티 활동가들이 1:1로 만나 섹슈얼리티, 스쿨미투, 주거권 등을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영상 보러 가기.
경계넘기: 위티의 페미니즘 교육활동가 양성 프로젝트. 대다수의 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구시대적인 성교육에 문제의식을 느낀 청소년들이 모여 직접 교육안을 만들고 실제로 또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교육까지 진행해보았다.
지혜: 사실 위티 활동을 할 때 주변에서 우려를 많이 받았었거든요.
도현: 다른 단체 활동가들로부터요?
지혜: 네, 근데 결과적으로는, 안 될 것 같은 일들을 안 될 것 같은 방식으로 했던 게 바로 우리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점이었어요. 왜냐면, 될 것 같은 방식에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났고, 될 것 같은 방식에서는 할 수 없을 일들을 했으니까요. 그 때 위티가 냈던 욕심들, 혹은 조금 더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끝의 끝까지 사람을 믿고 그 사람의 성장가능성을 믿고 대화를 하려고 했던 나의 활동 방식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었지만 후회되지는 않아요.
도현: 위티 활동을 하면서, 일을 다 놔버리고 싶다거나 너무 힘들었던 순간도 있으셨나요?
지혜: 위티는 저에게 ‘책임진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해준 조직’이에요. 책임을 진다는 건 사실 되게 외로운 일이구나,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위티에 대해 깊은 자긍심을 가질 때 나는 그 자긍심에 쉽게 동참할 수 없는 일이구나, 느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위티를 진심으로 아낄 때 전 때때로 그 애정이 불편했는데, 그건 그 애정에 담겨져 있지 않은 번잡함, 거추장스러움, 책임감, 무거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위티에 대해 많은 사랑을 표현할 때, 저는 그런 사랑을 오랫동안 받고 싶고 사람들이 그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으면서도 그 사랑을 쉽게 내 것처럼 받아들이지는 못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위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2018년부터의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저한테는 '우리가 멋진 것을 했어'라는 박수보다는 각 시점의 초조함들로 차 있는 거예요. 그냥 잘하고 있는 부분에 더 주목하면서 낙천적으로 나아갔다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게 아쉬워요. 내가 해온 일들 혹은 동료들이 해온 일들에 내가 혹시 충분히 박수 쳐주지 못했나? 내가 스스로에게 고생했다고 말해주지 못했나?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 할 때 내가 너무 그 뒤에 있기를 자처했나? 동료들과 함께 웃지 못했나? 이런 고민들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도현: 정말 솔직하고 정확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많은 활동가들이 공감할 것 같아요. 근데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동료들과 온도 차를 느낀 이유는 뭐였다고 생각하세요?
지혜: 운동(의 방향)에 대한 합의를 하기 어려운 조직 문화가 있었죠. 위티는 스쿨미투를 계기로 만들어진 단체이기에 창립 초기에 정말 많은 (언론과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운동에 대해 끈덕지게 볼 수 있는 시간들이 부족했죠. 사실 운동이란 그런 거잖아요. ‘너는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해? ‘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럼 그 변화를 이루기 위한 우리의 위치는 어떻고 그것의 방법론은 뭐야?’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과정인 건데… 그런 질문들을 서로의 얼굴을 보고 할 시간보다는 주로 외부에서 터진 사건들에 대응해야 하는 시간이었죠.
도현: 기자한테 설명해야 되고. (웃음)
지혜: 실무적인 것들을 잘 하고 싶은 욕구는 있었지만, (막상 운동에 대한) 그런 전반적인 합의는 하기 되게 어려웠어요. 물론 그런 시도들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에요. 위티 처음 만들 때도 세미나를 했었어요. 좀 재미없지만 의미 있는 책, 운동에 대해 논의하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거였죠. 그런 것들을 조금 더 할 수 있는 여력이 내년에는 있기를 바라요.
도현: 사실 지혜 님은 위티 이전부터 여러 활동 경험들이 있으셔서,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르는 데 별로 망설임이 없으셨을 것 같아요.
지혜: 저는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활동가’와 ‘참여자’ 사이에 구분을 많이 안 뒀던 것 같아요. 비장하고 결의 있는 거 싫었고. (웃음) ‘내가 활동가가 되겠어'라는 생각보다는 일상의 연장선상에서 운동을 해보려고 되게 노력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들 기특하고 대단하다고 하니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건 내 삶과 연결된 거고, 난 그냥 평범하고 무난하게 사는 것이지 대단한 결심을 한 게 아니야’라고 너무 해명하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한편으로는) 그냥 제 성향인 것 같아요. 내가 살아가면서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러한 지향을 가지고 실천을 하면서 살아갈 거라는 자체를 별로 의심해 본 적은 없어요. 다른 직업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세상을 바꾸는 사람으로 살겠지,라는 생각. 그냥 그거면 됐지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 꼭 활동가로 불리지 않아도 되지만 남들이 날 활동가로 부른다면 ‘뭐,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 정도로 이 직함을 생각해 왔어요.
[사진] 어둑한 저녁에 지혜가 균형을 잡으려는 듯 양 팔을 벌리고 차도와 인도의 경계를 걷고 있다. 지혜 뒤쪽으로는 여러 상점들과 가로등의 불이 켜져 있다. [사진 끝]
도현: 지금은 기본소득당으로 직장을 옮기셨고, 위티에선 운영위원으로 느슨하게만 활동하고 계시죠. 시민운동과 정당운동은 다른 면이 많은데 이직을 선택하신 이유가 뭔가요?
지혜: 올해 초에, 위티에서 더 활동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새벽에 눈물이 나서 잠에서 깼는데 2시간 동안 못 잔다거나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아,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구나’ 싶었죠. ‘언제든지 내가 힘들 때 조직보다 나를 우선시해야 된다는 원칙을 지킬 시점이 바로 지금이야!’ 이런 생각… 잠깐 쉬어가며, 위티에서 내가 했던 운동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기를 가지기로 했죠.
또 한편으로는 제가 위티에 대한 확장의 욕구를 갖고 있거든요. 위티가 단순히 청소년인권이나 페미니즘 의제만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의제를 청소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짚을 수 있는 조직이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런 면에서, 정당에 들어가서 좀 더 폭넓은 의제들을 다루고 그 안에 청소년인권과 페미니즘을 녹여내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도현: 제가 지혜님 고등학교 때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그때부터 기본소득 얘기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참 신기했어요. 아직 기본소득당에서 일 시작하신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간 위티에서 쌓은 관점이나 경험을 정당 안에서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해 보셨나요?
지혜: 저는 ‘쉬운 정당’에 대해 생각해요. 위티에서 동료들과 오랫동안 얘기했던 건 ‘우리의 운동이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잘하기 좋은 운동이다’라는 얘기였거든요. 페미니즘 운동의 언어와 고민, 논의들이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겐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참여의 장벽을 낮출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게 됐어요. ‘청소년 참정권’의 또 다른 말은 ‘쉬운 정치’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쓰이는 정치의 언어들이나 방식들이 청소년의 삶에 가 닿기 어려우니까요. 기본소득당은 그런 면에서 올해 (202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 '이해하기 쉬운 정책 자료집'을 만들어서 발달장애인이나 청소년이나 이런 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했었어요.
또, 기본소득당에서 제가 고민하는 건 이런 거에요. 기본소득의 원칙이 '모두에게, 조건 없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모두'에서 배제돼 있던 이들에 대해서 질문하게 되잖아요. 예를 들어 '청소년한테 기본소득 어떻게 줄 건데?'라는 질문이 저는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기본소득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제도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정상) 가구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던 복지제도 자체와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돌봄, 청소년이 사회적 활동을 할 때 필요한 것들에 대한 논의도 있어야 될 거에요.
사실 정당 차원의 메시지를 정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만드는 일은 지혜에게도 많이 낯선 업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거침없이 설명하는 지혜의 표정에서 설렘이 읽혔다. 특히, 이전에 건드려보지 않았던 것들을 고민하는 것이 “좀 엄두가 안 나고 어렵지만, 그래도 해 보고 싶다”는 마지막 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지혜는 늘 그 말을 닮은 사람이었음을, 인터뷰를 마치면서 깨달았다. 활동의 어려움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걸 회피하기보다는 치열하게 고민하며 나아가는 사람. 지혜의 단단함을 마음 다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