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티 평등문화위원회의 '위티 활동가의 네모' 기획연재 ⑦
[그림] 봄다의 활동 연표: 왼쪽 점부터 ‘이천십육년 청소년 녹색당 활동가’, ‘이천십육년팔월부터 이천십칠년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활동가 및 운영위원’, ‘이천십구년 대안대학 지순협 입학’, ‘이천이십일년이월부터 육월 위티 정세국장’라고 쓰여 있다. (디자인: 경하) [그림 끝]
2016년 겨울,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이하 ‘청페모’)에서 봄다를 만났다. 우리는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며 친구가 되었다. 봄다는 탈학교를 하고 여러 사회운동 단체에 오가다가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에서 운영위원회(이하 ‘운영위’)로 활동했다. 이후 3년 정도 휴식기를 가진 뒤 다시 위티에서 정세국*장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내 기억 속의 봄다는 상대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기 전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양해를 구하곤 했는데, 나는 그런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그가 사람을 대할 때의 사려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봄다의 첫 사회참여 활동은 중학교 재학 당시 참여한 젠더퀴어 가시화 운동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과 부스를 열고 퀴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는 활동을 했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과 연계하여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봄다에게 활동이란 “자기 자리에서 주변과 상호작용하며 뭔가를 만들어 내거나 서로 변화와 자극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지만,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던 것이 아쉬워 이번 인터뷰를 꼭 진행하고 싶었다. 우선 봄다에게 지난 활동의 경험이 어떻게 남았을지 물어보았다.
정세국: 정세국은 페미니즘과 어린이·청소년 관련 사회/문화/정치적 사안에 대해 논의하는 기구이다. 위티의 관점을 담은 논평을 내고 위티 내부에서 뉴스브리핑을 해왔다. 2021년 9월부로 해산됨.
봄다: 처음 청페모에 가게 된 건 탈학교를 하고 나서였어요. 내가 뭘 해야 될까, 뭘 하고 싶어하지, 고민하면서 다양한 장소와 사람을 찾아다니던 때였어요.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이라는 단체가 있어요. 거기서 하는 프로그램에 갔다가 ‘청소년 녹색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때는 또 신기한 게 뭔가 서로서로 연결이 돼 있더라고요 (웃음) 한 명만 알아도 약간 이렇게 뻗어나가게 되는 게 있었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청페모에 있었던 지혜랑 태양도 만나게 되었는데 ‘내가 찾던 모임’ 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계속 모임에 나가게 되고, 관심을 더 많이 갖게 되고, 시간을 더 들이면서 그 공간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그것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활동을) 하고 싶고 이게 진짜 내가 생각하기에 필요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동력으로 작용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명확히 언어화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처럼 품고 있었어요. 그런데 청페모 사람들을 만났고, 내 생각을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또 나 같은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이 공간을 더욱더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림] <페미:나>의 포스터. 보라색 무늬 배경 상단에 하얀색 페미니스트 로고가 있고, 하단에는 하얀색 박스와 텍스트가 있다. 문양 위에 보라색 큰 글씨로 ‘청소년 페미니즘 캠프 페미:나’라고 쓰여 있다. 그 하단에 하얀색 작은 글씨로 ‘우리의 삶과 페미니즘을 잇고 페미니즘으로 우리의 일상을 바꾼다 청소년 페미니즘 캠프, 페미니스트:나’라고 쓰여 있다. 하얀색 박스 안에 ‘일시 이천십칠년 일월 이십일부터 일월 이십이일(삼일간). 장소 서울 국제청소년센터 참가비 청소년 삼만원 비청소년 오만원 *숙박시 만원씩 추가. 프로그램 섹슈얼리티 우리는 원하는 대로 사랑하고 있을까? 가족 그 집은 나를 위한 집이 아냐 몸 조신한 소녀가 되기를 거부한다 나이 청소년은 아직 ‘어려서 안된다’는 어른들에게. 문의 및 신청 youthfemi@gmail.com. 주관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본 캠프는 이천십칠년 페미캠프의 시리즈로, 2030 여성 페미니스트 캠프, 남성자매캠프 <케빈인더캠프>와 함께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출처: 위티) [그림 끝]
그 당시 청페모는 소모임 같은 걸 했던 것 같아요. 책 읽고 세미나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 얘기 나누고, 이런 걸 했을 때 제가 갔었어요. 『올 어바웃 러브』라는 책을 읽으면서 세미나를 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 책을 다 같이 읽고 사회가 요구하는 사랑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고 탐구해보고 이랬던 시간이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그리고 힘들었지만 정말 재밌었던 기억이 <페미:나> 캠프를 하면서였던 것 같아요. 준비 과정은 사실 많이 힘들었고 되돌아봐야 할 점이 많긴 해요. 그건 차치하고 캠프를 열었던 딱 3일 동안은 그 경험이 되게 저한테 뭔가,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되게 많은 걸 가져다줬었던, 정말 즐거웠던 경험이었어요.
<페미:나>는 국내 최초 청소년단체가 주관한 청소년 페미니즘 캠프이다. 캠프가 열린 2016년은 강남역 살인사건, 메갈리아 이후 사회에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쉬가 극심하던 때였다. <페미:나> 캠프는 1020 영영페미니스트들이 모여 안전하고 자유롭게 놀면서 연대하는 장이었다.
아고 : 청페모에서의 다양한 활동 경험이 봄다님의 일상에 어떤 변화나 영향을 주었나요?
봄다: 이 세상과의 연결감. 뭔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일단 청페모 활동 전에는 좀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았거든요. 집회나 단기 활동을 갔다가 그 현장을 벗어나서 집으로 혼자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무력감. ‘이런 걸 계속 한다고 세상이 진짜 변할까?’, ‘이게 의미가 있겠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이 있을까?’ 이런 고뇌와 무력감이 되게 컸어요. 청페모 활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지속적인 활동을 하면서는 그런 무력감들이 좀 상쇄됐어요. 그러니까 ‘세상이 정말 변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진짜 뭔가를 하고 있구나’ 그런 힘을 많이 얻었고 ‘우리들의 연결이 세상과도 확실히 연결돼있구나’ 그런 연결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아고: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초반부터 운영위를 쭉 하셨는데, 그렇게 단체 중심부에서 운영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있을까요?
봄다: 운영위를 할 때는 되게 큰 결심 같은 걸 품고 했다기보다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리고 생각해 봤을 때 해봄 직하겠다. ‘그래 해보자’ 하고 뚝딱뚝딱하게 됐어요.
아고: 운영위를 하면서 어땠나요?
봄다: 운영위를 맡으면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정말 제대로 해냈었을까 하는 생각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좀 지나고 와서 죄송한 것 같아요. 그때는 모든 게 다 거의 처음 해보는 일이었기 때문에 되게 많이 헤맸었고,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했어요. 그랬는데 지나고 생각해 보면 그런 나와 일하면서 (다른 활동가들이) 어쩌면 조금은 힘들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생각을 조금 하는 거죠.
아고 : 봄다님이 청페모에서 이렇게 활동을 하시다가 활동을 그만두게 되셨는데 그때는 어떤 시기였는지 또 왜 활동을 쉬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봄다: 2018년 중후반에 제가 활동을 좀 정리했었던 것 같고요. 사실 그만두게 된 때도 정확히 뭐 때문에 그만뒀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데 시기가 다 맞물렸어요. 그때 제 일상은 온통 활동뿐이었고, 그러다 보니까 심적으로 많이 소진되었던 것 같아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내가 이걸 계속하는 게 맞는 걸까?’ 고민하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조금씩 제 취미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글쓰기 강의를 들으러 다니면서 활동을 몇 개씩 정리하다 보니까 (청페모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됐던 것 같아요.
2018년 하반기에 청페모 운영위는 모임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과 활동가들의 사정으로 활동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은 각자의 위치에서 외롭게 각개전투하던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하고 싶은 것을 몽땅 해보는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모든 과정이 서투르고 순탄치 않았지만 청소년의 목소리를 세상에 드러내고 우리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즐거웠다. 단체는 사라졌지만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에서 만나 동료가 되고, 소모임을 운영하고, 집회를 꾸리고, 함께했던 시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언젠가 청페모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한다. 그리고 2019년 스쿨미투를 계기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가 창립되었다.
봄다: 제가 일단 그만두고 나서 1년 반 동안 그냥 혼자 강의를 들으러 다녔거든요. 무슨 강의냐면 그냥 뭐 그런 강의였어요. 철학, 여성학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다니다가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대안대학 지순협’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제가 지순협에 들어가는 결정을 지혜한테 말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었어요. ‘내가 공부로 기반을 다지겠다. 다시 위티로 돌아오게 될지 아닐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청페모 활동과 연관성이 있고, 동떨어져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돌아오게 된다면, 그간 해 온 공부를 기반으로 활동을 더 연속성 있게 이어갈 것이다’라고요. 근데 이번에 돌아올 때는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돌아올 때 마음은) 내가 배우긴 배웠는데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있었고. 그리고 제가 정세국 일을 제안 받았잖아요. 그때 당시에 저는 위티가 어떤 상황인지는 잘 알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배우고 생각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위티의 정세적인, 정치적인 틀을 같이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그림]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논평 1번 기획논평 채식급식선택권 모두를 위한 학교 급식을 위해. 2번 이번에도 골든타임을 놓칠 것인가 계속되는 북일고·북일여고의 #스쿨미투에 연대하며. 3번 제 구십구회 어린이날 맞이 논평 미숙해도 괜찮은 세상이 필요하다 -린이 잼민이 등의 신조어 유행에 부쳐. 4번 정세국 6월 논평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여성 청소년이 동등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확인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출처: 위티) [그림 끝]
아고 : (봄다님은) 청페모와 위티가 같은 단체로 느껴지셨나요? 아니면 돌아왔을 때 조금 낯설었을지 이런 것도 좀 질문드리고 싶어요.
봄다 : 후자였던 것 같아요. 분명 연속선상에 있는 건 맞지만 굉장히 낯선 공간에 들어온 느낌이 컸어요.
아고 : 왜 그런 느낌이 드셨을까요?
봄다 : 일단 가장 크게 가시적으로 와 닿았던 건 사람이 바뀌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굉장히 많고 그리고 또 뭔가 바뀌었는데 뭐가 바뀐 지 모르겠으니까 감을 못 잡는 나날들이었어요. (청페모와 위티의) 차이점은 일단 위티에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아요. 그때보다 단체가 더 알려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내부 운영 방식도 많이 달라졌어요. 청페모 때 생각해 보면, 조직의 체계나 운영 면에서 일을 서로 숙지하고 하기보다 그때그때 가능한 사람이 일하는 느낌이 컸었거든요. 위티는 부서로 업무가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고 우리가 어떻게 일을 해나갈 것인지를 계속해서 고민하고 바꿔보고 시도해보고 이런 게 차이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거를 가장 크게 말할 수 있는 거는 청페모는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이었고, 위티는 ‘네트워크’다.
아고 : 초반에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게 활동의 동력이었다면, 지금 활동의 동력은 무엇인가요?
봄다: 위티로 돌아온 후에 활동 동력은 확실히 연결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위티에서 일을 하면서 뚜렷한 ‘정세국장’이라는 직책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좀 정세국 자체에 대한 고민이 크게 작용했어요. 정세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되게 주기적인 성취를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사실 힘들기도 했지만요. (웃음) 어쨌든 책임감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봄다: 청소년일 때 청페모 활동을 하면서 그런 상상을 많이 했었어요. ‘내가 청소년이 아니고 비청소년이 된다면 이 운동을 어떻게 해나가고 있을까?’ 주변에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있었고, 내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상상과 고민을 해 놓아서 그런지 막상 비청소년이 되고 나서 청소년 운동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로 인해 발생한 변화는 없었던 것 같고요. 위티에서 여러 활동가를 만나면서 좀 더 내 인생에 대해 전보다 디테일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됐어요. 활동을 내 삶에 어떻게 놓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하기 시작했고, 예전에는 뭔가 그냥 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더 고민하게 되고 그런 게 그냥 있는 것 같아요.
[그림/사진] 이천이십일년 오월 진행한 위티 브랜딩 스프린트. 왼쪽 그림은 상단에 파란색 텍스트로 ‘무엇을, 어떻게, 왜’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크기가 다른 원 세 개가 포개져 있다. 오른쪽 사진은 흰색전지 종이 위에 노란색 포스트잇이 여러 장 붙어 있다. 파란색 글씨로 ‘1번 참석자 명단 2번 이십년 로드맵 3번 무엇을, 어떻게, 왜 4번 가치 5번 오디언스 6번 슬라이더 7번 경쟁자치도 8번 소감’이라고 써져 있다. (출처: 위티)[그림/사진 끝]
[그림] 상단에 파란색 텍스트로 ‘20년 로드맵 작성’라고 쓰여 있다. 하단에 노란색 연표 막대가 있고, 순서대로 ‘현재-1년-3년-5년-??’라고 쓰여 있다. (출처: 라원)[그림 끝]
예전에 ‘브랜드 스프린트’*라고 홍보국에서 진행했던 게 있어요. 위티가 앞으로 1년 후 3년 후 5년 후에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지 생각해보고 위티가 갖고 있는 가치를 서로 얘기해서 조율해 보는 시간이었어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다들 몇 년 안에 위티의 안정화를 바라는 느낌이었거든요. 네, 그래서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 위티가 안정화되는 것을 지켜보는 거예요.
브랜드 스프린트(brand Sprint)는 세상에 위티의 가치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워크숍이다. 위티의 핵심적인 가치는 무엇인지, 위티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등을 함께 상상하고, 새롭게 정립한 가치를 기반으로 단체의 브랜드 전반을 리뉴얼할 수 있다.
봄다는 2021년 9월부로 정세국이 정리되면서 활동을 그만두었다. 봄다에게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은 청소년 페미니스트 동료를 만나 세상과의 ‘연결감’을 느끼게 해주는 통로였다. 그리고 활동을 그만하던 시기,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을 시작하면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다시 위티에 와서는 동료 활동가들과 그동안 자신이 갈고 닦은 공부를 발전시켜 위티의 정세적인 틀을 마련했다. 그는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짧지 않은 기간동안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과 위티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삶을 더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봄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료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실감했다. 지금의 위티도 누군가에게 간절히 필요한 ‘공간’일 것이다. 더 많은 청소년들이 페미니스트 동료를 만날 수 있기를, 덜 외롭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