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울증을 대하는 자세
누군가 내게 '언제부터 우울증을 앓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확실하진 않지만 초등학교 3학년 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언제 처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대답해줄 수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의 여름 어느 무렵이라고.
십 년도 채 살지 못한 꼬맹이가 대체 무엇이 그리 힘들어서 죽고 싶었을까. 그 어린 아이가 뭘 안다고 말이다.
당시 나는 학교 수학 시험에서 80점 언저리를 받았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심하게 혼나는 중이었다. 학교 가기 전 아침이었고, 당장 현관문을 나서지 않으면 지각할 위기였다.
엄마는 학교 갈 시간에 늦었으니 마지못해 날 보내주면서도 내가 현관문을 닫을 때까지 폭언과 함께 으름장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 지각하면 죽을 줄 알아!"
라고.
당시 우리집은 4층이었는데,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올라가는 계단을 보며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리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그것이 나의 최초의 자살 충동이었다.
그때 내가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리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다.
혹시 그렇게 어물쩍거리다 기어코 학교에 늦어 엄마에게 또 혼날까봐. 수학 시험도 망쳤는데 학교에 지각까지 하는 '싹수가 노란 년'이라는 소리를 또 들을까봐.
아마 내가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 아닐까 항상 생각한다.
나는 그때부터 현재 24살이 될 때까지 (만 24살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우울증과 함께 살아왔다.
초등학교 6학년의 어느날에는 학교에서 으레 연 행사처럼 하던 심리검사 설문지에서 '최근 자살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만 봐도 눈물이 났으며,
중학생 때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어떻게 하면 다음날 엄마에게 덜 혼나고 학원에 잘 가며 친구들과 더 잘 지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고등학교 때는 음, 후에 서술하겠지만 본격적으로 우울증이 심해진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수능을 거쳐 대학교에 가 막학기가 될 때까지.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우울증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오랜 기간 동안 한 번도 병원을 찾은 적이 없다.
해파리는 평생을 물 위를 둥둥 떠다니며 살아간다. 눈에 띄는 해파리의 특성 중 한 가지는 바로 재생력이다. 해파리는 재생력에 한계가 없어 몸의 일부가 손상될 때마다 스스로 재생을 해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오래 살아간다고 한다.
짧은 내 일생을 반추해보며, 나는 항상 내 자신이 부평초 같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병원을 찾지 않던 내가 병원에 가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밤에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잠을 자지 못하는 밤이란 너무 오래되어 이젠 내 습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익숙했지만, 이번 불면은 특히 더 심했다. 밤마다 뜬눈으로 천장을 보며 나는 내 머리에 총을 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아마 대한민국이 총기 허용 국가였다면 진작에 실행에 옮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점에 고마워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정신과를 찾았다. 내 나이 스물 세살의 일이었다.
수면제를 받기 위해 찾은 정신과에서, 나는 만성 우울증과 기분부전증 진단을 받았다.
당연한 얘기였다. 예상했던 결과였기도 하고.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는데 내가 우울증이라는 말에 새삼 이렇게나 충격을 받다니. 이것만큼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마 의사의 입에서 '환자분은 지금 병을 앓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직접 들어서가 아닐까.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라고 흔히들 말하곤 하니까. 내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매일 약을 먹으며 관리해줘야 하는 환자라는 걸 새삼 실감해서 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평생을 스스로를 부평초 같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 어디에도 발을 디디지 못하고 정처 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삶.
물론 육지 생물인 내가 물 위에 적응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장장 15년을 떠다니다 보니 나는 떠다니는 삶에 적응해버렸다. 물 위에 떠다니며 웃고, 떠들고,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내가 있는 곳이 물 위라는 것을 까먹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의사의 진단명을 듣고, 나는 새삼 깨달아버린 것이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내가 바로 '우울의 바다'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해변가에서 따뜻한 햇볕을 즐기며 모래 찜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주 가끔씩만 물에 발을 담그기만 하고 말이다.
내가 있는 곳이 사실 '우울'이라는 이름의 바닷물 위였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내가 취할 행동이란 뻔했다.
깜짝 놀라 발버둥치기. 그 와중에 물을 잔뜩 먹는 건 덤이었고.
지금 나는 그 발버둥 과정을 지나 이제 육지를 향해 조금씩 수영하는 중이다. 이미 육지에서 멀어져 떠다닌지 15년이나 되어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열심히 수영하다 보면 언젠가는 해변가에 닿지 않을까.
이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자신이 해파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해파리는 그렇게 바닷물을 둥둥 떠다니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따뜻한 수온을 귀신 같이 찾아가곤 하니까. 그렇게 떠다니면서도 재생력이 좋아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며 오랜 시간을 사니까.
나도 해파리처럼 열심히 헤엄치다 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해변에 도달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상처를 치료하며 오래오래 살 수 있겠지.
스스로를 해파리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냥 하나의 비유법이 아니라 어찌 보면 소망이기도 하다.
부디 내가 오래 오래 살기를. 열심히 헤엄쳐 마음 가는 해변에 정착하기를.
이 글이 그 시작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