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고 하지를 않아서 문제.
중국은 공산국가이며 한국인이 중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비자 VISA
[명사] [법률 ] 외국인에 대한 출입국 허가의 증명. 외국을 여행하려는 사람은 현재 자기 나라 또는 체재국(滯在國)의 대사(大使), 공사(公使), 영사(領事)로부터 여권에 그 나라의 출입국 허락 서명을 받아야 한다.
'visa'의 검색결과 : 네이버 사전 (naver.com)
중국에서 허가해 주는 비자의 종류로는 취업비자, 유학비자, 상용비자, 동반비자, 관광비자, 탄친비자, 고급인재비자, 승무원비자 등이 있다. 이 중에 일반인이 보통 받는 비자는 상용비자 또는 관광비자다. 만약 중국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자 한다면 취업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취업비자 없이 급여를 받거나 일을 하다 적발되면 강제 추방을 당한다. 공산국가이기에 더욱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에 대해 봐줌이 없다.
나는 중국에서 상용비자로 1년, 동반비자로 3년, 무비자(코로나로 인한 비자 연장)로 반년을 버텼다. 상용비자는 최대 체류기간이 90일이라 3개월마다 한국에 다녀와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홍콩이나 마카오 대만이라도 나갔다 들어와야 했다. 당시에 나는 남편의 취업으로 인해 중국에 왔기 때문에 동반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고, 동반비자를 받는 순간부터 일을 하거나 소득이 발생해서는 안됐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고서는 두 사람이 먹고살기 힘들 만큼 북경의 물가가 무섭도록 치솟았다. 생계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시작했다. 적발되면 추방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던 건 언제든 추방되면 그리운 한국으로 돌아가 잘 지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일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매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당시 내가 했던 일은 <방문 피부관리>로 고객의 집에 방문해서 피부관리와 바디 왁싱을 해 주고 돈을 받는 일이었다. 북경에 사는 한국 여성들이 주로 정보를 얻고 교류하는 네이버 카페 <북키맘>에 홍보를 하면 적당한 선에서 영업에 도움이 되었다. 하루에 3집 정도를 다니면 일주일에 12명 정도의 회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한번 방문에 평균 400위안을 벌었고 한 달을 일하면 20,000위안을 벌 수 있었다. 거기서 교통비와 재료비 식비를 제외하면 10,000위안 ~12,000위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문의하는 고객은 점점 많아졌고 매장의 위치를 묻는 손님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낮은 단계의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왁싱을 받던 고객이 제안을 했다. 자기와 함께 매장을 열어보자는 것이었다. 마침 매장을 오픈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를 샤미라고 지칭하겠다. 샤미는 자신이 사는 집을 활용해 샵으로 꾸몄다. 방 한 칸은 피부관리 룸으로, 거실은 뷰티 수업과 고객상담실로 쓰였다. 그리고 나에게 매장을 함께 오픈하기 전까지 이곳을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나의 고객 풀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을 샤미의 공간으로 불러냈다. 샤미는 함께 일할수록 앞과 뒤가 다른 모습을 많이 보였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자주 트러블이 발생했다. 나는 결국 샤미와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매장을 알아봐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당장 매장에 방문하는 고객들을 위해 새로운 공간을 빨리 세팅해야만 했다. 샤미의 소개로 알게 된 한국 여성분이 있었다. 그 여성은 라스라고 지칭하겠다. 라스는 나에게 좋은 자리가 있으니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 좋은 자리는 운영 중인 미용실의 샵인샵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전기, 수도, 관리비용을 포함해 한 달에 10,000위안이라는 깜짝 놀랄 금액의 월세를 불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업집조(사업자등록증)에 미용과 피부미용이 포함되어 있어 문제 될 것 없고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원한다면 비자 발급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수지 타산이 맞는지 계산해 볼 차례, 내가 하루에 받을 수 있는 고객 평균을 8명이라 하면 객단가는 400위안, 하루 3200위안 한 달이면 70,000위안 좌우는 나오겠구나! 그러면 월세 10,000위안은 별것 아니다!라는 계산을 토대로 계약을 했다. 고객은 분명 계속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홍보를 위해 객단가를 낮추는 바보 같은 짓을 했고 결국 객단가는 평균 300위안으로 떨어졌다.... 그 후의 일은 다음번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다른 사람의 영업집조를 이용해야 했고, 나는 여전히 동반비자 신분이었다. 혹시라도 경찰이 들이닥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늘 하며 지냈다. 그것을 해결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현실에 안주하며 살았다. 1년간 모은 나의 고객 풀을 활용해 영업집조를 내고 취업비자로 변경하고 당당하게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당시의 나는 이 모든 일이 무척 어렵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주변에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이렇다 할 답변을 주는 사람이 없었고(지금 생각해 보면 주변에 그걸 알만한 사람과 교류하지도 않았다는 게 함정) 늘 대기업 주재원 아내들을 부러워하며 살았다. 나는 매일 몸이 부서지게 일하는데 그녀들은 나에게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다는 사실이 나를 계속해서 찌질하게 만들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세상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였고 삶이 고단했고 어떤 것도 재미가 없었다. 다만 돈을 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침이 오는 게 싫었다. 눈뜨기가 가장 힘들었고 오늘도 얼마나 고단 할지를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쩌다 고객이 캔슬을 하면 그렇게 화가 났다. 온통 고객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가식 그 자체였다. 자본주의 미소와 서비스라고 나의 지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고객 한 명 한 명이 돈으로 보였고, 어떻게 하면 고객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낼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 저녁이 되면 술을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고 남편과 싸우고 울다가 잠이 들고 다음날 더 힘든 몸으로 다시 시작하는 하루.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때 선경 언니가 "지혜야, 체력을 키워야 멘털이 강해져. 운동을 해봐"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줬지만 난 '운동은 무슨 운동이야 그것도 여유가 있는 언니 같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그저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다.
나에게 혼자 있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자가격리> 일을 하지 못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미용실의 폐쇄> 미용실 원장은 도망을 갔다. 회원들의 카드를 환불해 주지 않은 채 야반도주와 마찬가지인 방식으로 북경을 떠났다. 나는 일터를 잃었고 시간이 생겼다. 책을 읽었다.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면서 책에 빠졌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부모님의 이혼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야 했던 나는 주로 혼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도 별로 없고 사귀는 방법도 몰랐다. 그 시간들이 나를 책벌레로 만들었다. 책을 많이 읽어본 사람들은 책을 빨리 읽을 줄 안다. 반복된 훈련으로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 찾아보는 방법도 알게 된다. 나는 살면서 궁금한 게 생기면 책부터 찾아본다. 인터넷 검색보다 책에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고 해결법을 얻는다. 난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며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오래가는 것들의 비밀> 이랑주 작가의 책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이제부터는 물건이 아니라 가치를 소비하는 시대"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새로운 곳으로.
모아둔 돈은 별로 없었다. 버는 족족 남편의 주머니로, 생활비로, 월세로, 빚까지 있던 터라 통장에 돈이 얼마 없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있었다. 나는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휩싸여 사업자 등록이 가능한 오피스텔을 덜컥 계약해 버렸다. 탈탈 털었다. 한국 통장과 중국 통장에 있는 모든 현금을 싹 다 긁어모아 계약을 했다. 나는 벌어야 했다. 살기 위해서 벌어야 했다, 전과는 달랐다. 목표가 생겼다. 보란 듯이 성공할 각오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