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웨이트 트레이닝을 만나기 전
문제는 모든 처음처럼 역시 우연찮은 곳에서 시작했다. 바로 이사다. 역시 딸내미 중학교 진학을 위해 다른 동네로 이사한 이후 저 거머리와 같은 악화들을 떠나 새로운 수영의 역사를 쓸 요량으로 동네 수영장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허나 어딘가는 물속과 물 밖의 레인이 맞지 않는다던지, 오리발을 못쓰게 한다던지 아니면 지나치게 이용료가 비싸거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모든 레인을 차지하고 산책을 즐기는 등등의 문제가 있었다. 최상급반 회원이 대부분 노인들로 가득 찬 경우도 있었다. 그분들의 스트로크는 일관되고 노련했으나 내가 경멸한 저 악화의 속도는 없었다. 그렇다. 한때 그렇게 경멸한 악화의 속도와 운동량을 집요하게 찾아내려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늘 증오하며 그것을 배운다. 머릿속 이해는 아침 이슬처럼 공허하지만 체득은 거듭되는 꿈속의 재현처럼 세포 속에 각인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살이 빠지는데, 내가 원한 것보다 더 빠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수영 선수 박태환이 하루 15,000 kcal 그러니까 평균 성인 남성 권장 칼로리의 다섯 배 이상을 섭취했다는 것, 그럼에도 그러한 날렵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운동량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딴에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찐다. '많이 먹는다'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이고 정성적 표현임을 인정하더라도 아무리 먹어도 오히려 어느 순간 '몸이 축난다'는 것을 느끼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심폐지구력의 관점에서 보면 불혹이 넘어 이건 뭐 다시 태어난 수준이 된 것이었지만 오히려 지나친 수영과 트레드밀 운동은 근량을 줄이고 얼굴의 팔자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뭐 옷태로 따지면 최고이지만 말이다. 한창 수영에 빠져 있을 때 그러니까 마흔서너 살 무렵 170cm 정도의 키에 62kg 정도의 체중을 유지하게 된다. 몸을 살피지 않았던 이십 대 후반 결혼 무렵 체중이 64kg 정도였고 신혼 이후 한때는 80kg에 육박했으니 이 체중은 아마도 대학 시절의 것이리라. 당시에는 거울 속 몸을 보면서 조금 더 멋진, 그러니까 더 슬림하고 매끈한 몸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속지 마시라. 위의 마지막 문장, 그러니까 '몸에 대한 욕망~'이란 것은 명시적/내포적 두 측면에서 모두 실패한 것이다.
위의 문장은 그저 앞선 전체 서사에서 그럴싸하게 단선적인 유기적 상관성을 구성하는 데에만 봉사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실 당시 내가 사로잡힌 감정은 어떤 사태, 뭐랄까 부스러지기 쉬운, 어떤 극점에 위치한 위기와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하는 오래된 버릇과 심리, 그것이 잉태한 자신에 대한 혐오의 감정들과 대적하려는 나름의 사투 과정에서 시작된 심리적 몸부림의 표면적 결과물로써 내 몸을 대상화하기 시작한 결과라고 말해 두자. 차라리 이 애매하고도 너저분한 관념적 문장이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십 대 중반에 접어든 남자의 몸부림을 이십 대 청년의 빛나는 허영과 욕망으로 재빠르게 치환하거나 독자가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인간을 모르고 문자의 환상을 즐기는 것이다. 육체를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라 단언할 수는 없어도 어떤 종류의 집착이 필요한 경우에 육체를 대상으로 삼아 욕망이 정신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내버려 두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아왔다. 나 역시 그런 상태였다고 먼저 고백과 동시에 얼버무리고 보리라. 구체적인 이야기는 언젠가 글 벽 어딘가로 스며 나오지 않겠는가.
탄력 있는, 매끈한, 강력한 등등의 어떤 목표를 향한 몸부림은 기실 육체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아니었다. 실은 어떤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이나 뻘로 잠기는 과정을 몸속에 각인해 가는 과정 그 자체에 대한 몰입임과 동시에 지독하게 허약한 부인, 저항, 외면 등등의 우발적 사건들의 총제인 것이다. 따라서 나이 마흔 중반이 넘어 매끈하다는 것, 강력하다는 것 혹은 탄력 있다는 것을 좇는 심리는 기괴하고도 우스꽝스러운 것이면서도 동시에 비극적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나이 쉰을 넘어 헬창을 꿈꾼다면 나는 당신이 과거 어떤 운동의 이력이 있었는지 보다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 지금 어떤 욕망과 싸우면서 동시에 그것을 육체 속에 차곡차곡 각인해나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