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노란 민들레
이야기 열여덟
노란 민들레
고재동(택시 기사ㆍ시인)
흰나비 한 마리 빈 하늘에 매달렸다가 황급히 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마당을 가로지르더니 지붕 위까지 올랐다가 뒤꼍으로 사라진다. 강아지와 나를 이상한 물체로 감지한 것인지, 우리 따윈 괄호 밖 나비 여정쯤으로 봤는지 성큼 큰 걸음으로 난다. 그의 궤적을 급히 쫓았건만 실루엣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비 걸음이 저처럼 빠르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봤다. 벌이면 몰라도 나비가 사람 걸음을 앞서리라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예 답이 나왔다. 나는 가는 세월 앞에 뒤뚱거리고, 갓 나온 나비는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일 것이란 결론을 지었다.
배추흰나비인 듯한데, 배추 철은 아직 까마득하건만 민들레 철에 왜 왔을까? 어여쁜 봄날, 달곰한 꽃날이 정녕 그리웠던가? 배추흰나비, 그가 우리에게 곁을 주지 않고 급히 떠난 이유가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 평상시 낮게 강아지 머리 위를 날다가 천 배 몸집이 큰 그에게 먹힐 뻔했던 기억과 만 배 큰 이상한 동물체 인간에 기겁했거나. 다른 뜻에서 거리두기를 했던 건 아닐 거야. 꽃과의 약속, 임과의 약속 시간에 쫓겼을 거야.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아서, 아무도 말 붙이려는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게 된다.
세상에서 없어진 지 하도 오래되어서 거리두기란 말조차 생소하지만
씻지 않고 빨지 않은 냄새가 든든한 벽이 되어서 팔다리뿐 아니라 눈빛이며 뼛속까지 사회적 거리를 둔 지 오래다.
<중략>
고양이들 틈에 끼어 나도 쓰레기통을 뒤지고 싶지만 내가 기생하는 숙주는 오늘도 햇빛 거리두기 바람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중이다.
--김기택 <노숙존자>'
김기택 시인은 코로나를 통해 소외된 계층, 즉 노숙자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의 입이 되어 절규하고 있다. 'A형 독감보다 독한 혐오와 멸시와 수치가 극심한 발열 후에 항체가 되어서,... 홀로 외롭게 창궐하고 싶다면 , 코로나바이러스여, 얼마든지 여기 와서 노숙해 보라.' 또한 시인은 행간에서 지구를 괴롭힌 만큼 복수당하고 있는 이 사회를 개탄하며 소외된 계층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가? 100세 시대가 도래함에 고령화 사회로 이미 진입했다. 노인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소외 계층도 늘어난다. 사회로부터의 거리두기가 심화되고 있다. 노인들 스스로 하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지팡이 하나 들기에도 힘이 부치고, 젊은이와 말을 섞으려 해도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 아니던가.
만학도로 편입학하여 어쩜 손주뻘 되는 학생들과 수업하며 가까이하기가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각만이 아닐 듯싶다. 괜히 미안하다. 자연 거리두기가 형성된다.
매화 지고 벚꽃 피고
벚꽃 가고 목련 오네
오는 건
꽃의 맘이지만
가고 싶지 않아도
떠나야 하는 꽃, 지구가 밉다
코로나 초미세 먼지
황사 비가 주룩주룩
가슴이 먹먹하다
눈을 닦고
귀를 씻고 씻어도
꽃잎 마구 떨구고 마네
서울 부산 사람들
시기하고 싸우고
거리두기 하지 않는
야단법석인 지구
뭘 볼 게 있다고...
허상만 좇다가, 그리다가
--<지구의 갑질>
"에라 잇! 이 마스크 갈기갈기 찢어버려야 해!"
"......!"
내 택시에 오른 손님은 느닷없이 목청을 돋우며 끼고 있던 마스크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차 바닥에 내팽개친다. 그리한들 마스크가 아프기나 하겠는가? 종이는 구겨서 힘껏 던져야 멀리 가건만 마스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여느 손님 같았으면 마스크를 잊고 탄 걸 죄송해하며 얼른 마스크 찾기가 일쑤인데 이처럼 반대의 경우는 처음이다. 채근하여 마스크 낄 것을 종용하는 게 무색해졌다. 술 냄새가 차 안을 휘돌아 스멀스멀 바깥으로까지 기어 나간다.
"이놈의 세상, 엎어버려야 해! 그러면 코로나고 뭐고 싹 사라질 게 아닌가!"
'무슨 크게 속상한 일이 있었나 보지요?'
무대응이 상책이다. 택시 운전 경험상 말을 섞다간 흥분을 부추길 수가 있다는 걸 터득한 터라 겉으로 말을 뱉지 않기로 작정해 버렸다.
"코로나 숫자 그거 엉터리야! 거리두기 하면 뭣 해! 진작 다 해제해 버렸어야 했어. 세계에서 오미크론 먹은 사람 가장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잖아? 영광스럽게도 한 달도 넘게 일등을 하고 있어."
'그래도 한때는 우리나라가 K방역으로 날리던 때가 있었잖아요?'
그는 나보다 열다섯 살가량 아래로 보였다. 아직도 흥분이 덜 가라앉은 듯, 횡설수설하고 있다.
"거리두기, 웃기는 소리야! 잘난 ×, 못난 ×, 돈 많은 ×, 돈 적은 ×... 더 벌어졌다구, 격차가. 돈 없고 빽 없는 사람 살아갈 길이 막막해. 소상공인들 다 깡통 찼잖아."
'이제 일상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으니까 차츰 나아지겠죠?'
"지랄 같은 세상, 내가 버리면 되지, 뭐. 지랄 같은..."
"......"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는가 싶었는데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군다.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손님을 흔들어 깨웠다. 차비를 선불로 냈다고 우겼다. 더 실랑이해 봤자 나만 손해일 것 같아 그 손님을 내려 두고 공차를 출발시켰다. 그와는 확실한 거리두기가 실행되었다. 백미러의 그는 뚜벅뚜벅 아파트를 향해 잘도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아내가 손주들 돌보러 서울로 떠난 지 사흘이 지났다. 20일간 거리두기가 불가피하다.
병아리 다섯 마리를 데려왔다. 아내가 떠나면서 병아리를 몇 마리 분양하라는 분부(?)가 있었다. 하솔이도 할아버지 집에 병아리를 더 키우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내온 바 있다. 네 마리이던 할머니 닭을 보름 전에 두 마리 잃고 나니 닭장이 너무 허전하기도 했다.
병아리라고는 하지만 두 달 된 중닭이었다. 닭장 큰 방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줬다. 환경이 바뀐 걸 감지한 병아리들이 어리둥절 모이도 쪼지 않는다. 작은 방으로 밀려난 두 마리의 할머니 닭도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병아리 닭을 침입자로 보는 눈치다. 당분간은 아무래도 거리두기가 필요할 것 같다.
닭장을 돌아 나오는데 민들레꽃에 앉았던 호랑나비가 깜짝 놀라 나풀나풀 난다. 점점 나와 멀어져 간다. 민들레만이 노랗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