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동 Apr 01. 2022

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고추 먹고 꼬끼요

이야기 하나
          고추 먹고 꼬끼오
                 고재동(택시 기사ㆍ시인)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와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새벽녘이었을 게다. 태화중앙로 길을 지나는데 쭈뼛쭈뼛 할머니 한 분이 차를 세웠다. 바로 차를 탈 생각을 않고 뭐라 뭐라 하길래 창문을 내렸더니 3천 원 밖에 없는데 택시를 좀 태워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일단 할머니를 차에 태웠다. 90도로 굽었던 허리를 펴고 뒷좌석에 자리한 할머니께선 꼬깃꼬깃 3천 원을 내민다.

  "미안하이더. 고추 상회까지 가는데 시간이 늦어서요. 빨리 가야 고추 꼭지 하나라도 더 따는데 늦잠을 잤지 뭐이껴. 맨날 걸어가는데 오늘은 너무 늦어서..."

  다음 날이었다. 혹시나 해서 그곳을 가봤다. 비슷한 시각,  90도 굽은 허리로 할머니가 부랴부랴 길을 가고 계셨다. 빠르게 걷는다고는 해도 젊은이 걸음걸이 반도 안 되었다.

  빵빵.

  "타세요, 할머니. 태워드릴게요."

  "아이시더. 오늘은 그렇게 늦지도 않았고, 차비도 없고요."

  "차비는 괜찮고요, 추운데 얼른 타세요."

  "괜찬타 카이요. 걸어가도 되는데..."

  할머니께선 한두 번 더 사양하시다가 마지못한 듯 택시에 올랐다.

  "이 추운데 매일 먼 데까지 걸어 다니세요?"

  "좀 일찍 일나면 갈 수 있니더. 이젠 습관이 돼서요. 택시를 타면 열 근도 더 따야 해서요."

  "고추 꼭지 한 근 따면 얼마 받으세요?"

  "3백 원밖에 안 주니더. 언제 적부터 오르지 않았니더. 손이 재바른 젊은이는 많이 따는데 나는 하루 백 근도 못 따니더."

  그다음 날도 태화중앙로를 훑다가 할머니를 모셨다. 새벽 두세 시. 이맘때쯤 어김없이 할머니의 실루엣이 저 멀리에서부터 다가온다. 안 보이는 날엔 적이 걱정된다. 어디가 편찮으신지...

  할머니 연세 아흔하나. 증손자를 돌보고 있는데 생활비며 방값, 아이의 학비도 만만찮아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딱한 사정을 조심스럽게 들려준 적 있다.

  코로나가 끝날 조짐은 안 보이고 봄은 오고 있었다. 버릇처럼 태화중앙로를 지날 때면 먼발치에서라도 할머니의 그림자가 보일까 싶어 살폈지만 입춘 이후 할머니의 모습을 한 번도 뵌 적 없다. 마지막으로 내 택시에 탑승했던 날의 할머니 말씀이 뇌리에 맴돈다.

  "뉘 집 성 씨를 쓰시는 양반인지 몰라도 복 받을 겠시더. 이렇게 골골해서 언제 죽을지 모르나 이 은혜 잊지 않을 낍니더. 손자를 봐서는 더 살아야 하는데 인명이 재천이라..."

  그날 할머니가 끼신 일회용 마스크는 유독 꾀죄죄 때가 묻어있었다. 차에 있는 마스크 몇 개를 건네니 사양하시다가 받았다.


  '거의 이동하지 않고 일정한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움직여도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전선. 양쪽 기단의 세력이 서로 평형을 이룰 때 생기며, 전선이 동서로 길게 생긴다. 여름철 발생하는 장마전선도 정체전선의 일종이다.'

  정체전선. 때아닌 가을장마가 기승이다. 여름에 제대로 한을 못 풀고 간 게 억울했던지 가을장마가 정체전선을 형성했다. 하늘이 뚫린 건지 세차게 비를 붓는다. 내 차까지 마당에 발 묶어버렸다. 좀처럼 휴무 외에는 쉬지 않는 내가 야심한 지금까지 일을 나가지 않고 있다.

  "마음 한 번 그렇게 먹었으면 오늘은 일 나가지 말고 편하게 그냥 쉬어요. 다리도 시원찮으면서..."

  아내가 흔들리는 내 마음을 붙잡아 앉힌다. 그래, 하루 돈 벌지 않는다고 밥 굶는 것도 아닌데 그러지 뭐. 사실 오늘 땡땡이치기로 한 것은 비도 비였지만 새벽에 일 마치고 들어와서 벌집 하나를 제거하려다가 종아리 근육을 놀라게 해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지난주 아이들이 다니러 온다기에 벌집을 네 개나 제거했는데도 미처 못 본 하나가 남아있었다. 벌 활동이 적은 어두운 밤을 택한 것이 오늘 새벽이었다. 생각난 김에 해치우기로 작정하고 갈퀴를 찾아 벌집 밑에 섰다. 새로 지은 집 추녀 끝이 너무 높아 모기약으로 제압할 수가 없어서 댓돌에 올라 갈퀴로 공격했다. 한 번, 두 번에도 실패했다. 그제야 적의 침투를 눈치챈 벌들이 방어와 공격 태세를 갖춘다. 엉겁결에 피하다가 미끄러지면서 댓돌 모서리에 종아리를 부딪쳤다. 근육이 심하게 놀라 제대로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벌침보다 더 독한 상처를 준 건 아마 벌이 내린 저주가 아닌가 싶다.

  아이들이 오후에 전해 듣고는 병원에 가보라고 성화다. 나는 괜찮다고 고집했고 아내도 병원 가자고 종용하다가 회관에 쪼르르 가버렸다. 고추 따느라 며칠 못 모이다가 비가 와서 고스톱판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올해 고추 농사도 짓는 둥 마는 둥이다. 지난해에는 비가 너무 내려 망쳤고 올해는 약을 한 번도 치지 않았다. 요즘은 살충제랑 탄저병약을 치지 않고 고추를 수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올해는 성한 고추가 제법 달렸다. 해마다 탄저균이 만만찮게 공격해 왔는데 올핸 왠지 느슨하다. 쟤네들도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있는 건지? 탄저병이 주춤하니 닭들이 설친다. 온 밭을 누비며 토마토, 가지, 잘 익은 고추를 마구 추수한다. 아내는 닭을 가두라고 성화이다. 수원에 사는 맹 교장께서는 닭이 그 매운 고추를 먹는다고요, 라며 놀라워했지만 닭은 본시 매운맛을 모르는 동물인지라 유독 고추를 좋아한다.

  "닭을 가둬요. 저러다가 고추를 다 따먹을 태세라니까요. 토마토와 가지를 박살 내더니 잘 익은 고추만 골라 쪼아 먹는다니까요."

  닭에 고추 몇 근은 바치고 나서야 그저께 닭집에 네 마리의 닭을 가뒀다.



먼 데서 왔나 싶어

흔드는 창문 여니

전생에 본 듯한 너

젖은 실루엣만이

적요 깬

처연한 비 안고

가슴으로 헤는 밤

            --<가을비>



  고추로 세상에 왔다가 탄저병으로 유명을 달리하든 닭에 쪼여 도중에 운명이 바뀌든 이 모두가 자연의 섭리이며 주어진 몫이다.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사람 또한 다르지 않다.

  낮에 확인한 벌집은 일부가 찢어졌으나 벌들은 여전하게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오늘 밤엔 가을비가 아무리 길을 막아도 일터에 나서야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