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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동 Apr 13. 2022

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풍경

이야기 넷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풍경

                   고재동(택시 기사 ㆍ시인)


  대문이 고장 나고 녹슬면 고치면 그만이다.

 대문을 오래도록 여닫고 버려두면 녹이 나고 삐걱거리기 일쑤다. 손때가 묻어 변색할 정도로 수십 년 드나들며 한 번도 색칠하지 않고, 손을 보지 않았다면 그 대문에서 좋은 소리를 듣기란 어려울 것이다. 오랜 시간 부려 먹었으면 그 대가를 지급해야 하고, 고마움에 보답하는 예를 갖춰야 그도 그 주인의 충실한 심복으로서 도적도 지켜 주고 집의 위용도 뽐낼 게 아니든가.

  대문은 단순히 바람막이와 도둑을 지켜 주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다. 그 집을 에워싼 담을 중심으로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외부인들로부터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인품과 가려진 그 집의 내막을 적절히 비춰주는 거울 같은 것이기도 하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는 사람은 그 배포와 배려심이 온 동네를 휘감고 있다고 봐야 한다.

  열쇠 구멍으로 그 집을 들여다보면 캄캄하기도 하고 형형색색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가지런하게 여기저기에 놓여있기도 하다. 사람은 속옷 바람으로 집안을 오가며 온갖 추태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집안에서의 자유를 누가 왈가왈부하겠는가?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오묘한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으면 그 집안의 풍경과 실체가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그 집주인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정갈하게 옷매무새를 고쳐 입는다.


  "안녕하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서문교회 뒤로 가 주세요. 가다가 내가 죽으면 010-6452-0000번으로 연락해 주세요."

  뜬금없다.

  "예?"

 생뚱맞은 손님의 말에 내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내가 집까지 못 가고 죽을지도 모르니까 이리로 연락해 주시라니까요."

  손님은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내밀며 목소리는 단호했다.

  "웬 별말씀을요. 돌아가시긴 왜 돌아가신다고 하세요? 지금 멀쩡하신데요."

  "멀쩡하긴요. 다 됐어요. 간 4기에 폐 4기, 심장은 두 배로 커져 있고..."

  택시에 오를 때 좀 굼뜨기는 했다. 지팡이에 의지한 몸에 짐까지 있었으니까 뒤 차가 클랙슨을 울릴 정도로 시간이 지체됐던 게 사실이다. 짐은 가게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실어줬다. 그렇다고 택시로 이동 중 절대로 잘못될 것 같지는 않았다.

  "웬 농담도 잘하시네요. 집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요즘 의술이 얼마나 좋은데요. 그깟 병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오래 살 생각도 없어요. 낼모레면 여든인데 여한이 없습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녀분은 안 계세요? 사모님은요?"

  "없어요, 아무도."

  그는 짧은 대답 후 한참 동안 창밖을 내다봤다.

   "쭉 혼자 사셨다는 말씀입니까? 결혼도 안 하시고요?"

   "... 결혼은 했지요."

  그는 뜸을 들이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다음 말이 기다려졌다.

   "......"

   "할마이는 오래전에 죽었고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30년 동안 연락이 없어요."

  "30년이나요? 무슨 사연이 있길래..."

   "할아버지 돈을 다 갖고 갔어요. 옛날에 선친이 돈을 많이 벌었는데..."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왔다 갔다 하는 그의 말에서는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제분이 하나도 안 계신다고 하시더니... 그동안 정말 삼 남매, 그 누구한테서도 연락이 없었단 말입니까?"

  "내가 죄인이죠. 이제 죽는 날만 기다려야 할까 봐요."

  "그럼 이 전화번호는 누구 거예요. 죽으면 연락하라고 했으니 선생님 전화는 아닐 테고..."

  "아니에요. 그거 도로 주세요."

  그는 전화번호 쪽지를 되찾아갔다. 말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지만, 누구로부터 연락이 오길 기다리고 있거나 전화로나마 목소리를 듣고 싶은 가족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전화번호가 수소문 끝에 알아낸 장남 전화이거나 딸의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가 그의 말속에 녹아있다. 그 누군가와의 소통, 닫힌 대문을 활짝 열고 싶은 욕망이 안경 너머 그의 눈망울 속에 회한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

  이윽고 차는 목적지에 닿았다. 그의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그를 부축했다. 나의 부축과 지팡이에 의지해서 대문 앞으로 다가선다. 철 대문은 낡아 있었다. 오랜 풍상에 낡고 녹슬어 볼품없는 몰골을 하고 서서 주인을 맞는다.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닳고 닳은 구멍을 찾는다. 제대로 갈 곳을 가지 못하니까 열쇠 꾸러미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내가 열쇠를 주웠다.

  "대신 좀 열어 주소."

  그가 말했다.

  열쇠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캄캄했다. 그런데 깊은 곳 어디쯤 반짝 불빛이 보여 열쇠를 꽂으니 찰칵 대문이 열렸다. 손바닥만 한 마당이 나섰고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문 하나를 더 연다.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백여 년이나 됨직한 흔적들이 파노라마처럼 매듭지어 펼쳐진다. 개조된 거실과 주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싱크대는 그럭저럭 치워져 있다.

  짐을 내려놓고 서둘러 그 집을 나섰다. 골목길에 세워 둔 차가 걱정되어서였다.

  "안녕히 계세요."

  "잘 가세요. 고마워요, 기사 양반."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쯤 담벼락 밑에서는 방금 몽우리 터뜨린 노란 국화 서너 송이 말갛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꽁보리밥 한 양푼을

   베보자기에 구겨 넣던 유년,

   뿅 방망이 서너 방에

   허기진 배 부여잡던 시절.

   할머니 빈 젖 빨며

   스르르 잠을 청할 때,

   보릿고개 넘어갈 길

   먼 산 뻐꾸기 섧게 울었지.

           --<공기압이 낮습니다>



   솟을문 문설주를 세웠다. 아내는 솟을대문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투덜대지만, 어차피 그 자리에 서고 말았으니 이제 주인을 닮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따름이다. 내 뜻에 따라 대문은 달지 않고 쪽문만 붙였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라 했다. 비록 덕은 쌓지 못할망정 좋은 이웃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살아가는 동안 나에겐 대문은 없다. 나는 언제든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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