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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동 Apr 18. 2022

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가을 수박

이야기 여섯

              가을 수박

                   고재동(택시 기사ㆍ시인)


  0개.

  "밤 주우러 갈래요, 나랑?"

  "아니. 할 일이 있어, 나는. 잠도 보충해야 하고."

  "당신이 나보다 밤을 더 빨리 줍는데..."

  "......"

  대꾸를 해 놓고 나니 2주 전 대화와 일맥상통한다. 작년에도 그런 듯싶은데 올해도 밤 주우러 산에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 마당에 떨어진 밤 몇 알 손안에 담았던 것이 고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껏 1년에 밤 10개를 안 먹으니까. 아내는 그래도 삶아 냉동해 놓았다가 일 나간 남편 빈자리에 소환하여 긴 겨울밤을 밤(栗)으로 위안 삼곤 한다.

  올해 벌써 알밤을 한 가마니 정도 주웠다. 아내 혼자. 지인들과 나누고 김치냉장고와 냉동고가 넘치는데도 오늘 또 밤 주우러 갈 참이다. 멧돼지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정작 아내가 어제 주워 온 한 말 넘는 알밤을 내 후배들과 나누기로 했다. 아내는 기꺼이 내어 주고 오늘 또 산에 오르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먹을 것이 귀하던 그 유년. 밤톨이 산에서 겨울을 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온 산의 낙엽을 뒤져 다람쥐 몫까지 가져왔으니까. 그래서 아버지는 산에 밤나무를 백여 그루 더 심었다. 밤이 열릴 즈음 당신은 유명을 달리하셨고, 이젠 그 밤을 거의 주워 먹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고향 마을 우리 산의 밤은 고스란히 다람쥐, 멧돼지를 비롯한 짐승 몫이거나 흙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아버지가 남긴 밤은 몇 해 전 딱 한 번 주우러 간 적 있다.

  우리 네 마리 닭의 하루 낳는 달걀의 숫자가 0개이다. 9월 말까지만 해도 1개였는데 그 통계 이후 한 개의 알도 생산 않는다. 올해 우리 닭의 나이 6살. 사람 나이로 보면 8, 90인데 생산을 하길 기대한다면 너무 가혹한 게 아닐까. 특히 겨울엔 알 생산이 힘든 듯. 겨울을 나기 위해 지방을 몸속에 축적해야 하고 털도 보충해야 한다. 이젠 노쇠한 티도 난다. 종일 무료하게 닭장에서 지내다 보니 체력에도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네 마리 닭 중 한 마리가 1m 남짓한 횃대에 오르지 못하고 사과 상자에 올라 밤을 지새운다. 하늘의 초롱 별이 되기 위해 조용히 준비하는 것 같다. 누구나 가야 하는 길. 그래도 지구별에서 잘 살다 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 먼저 온 초롱 별에 환영받지 않을까?

  할머니께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와 둘이 사랑방에서 기거하실 때 늘 옆구리가 시리다고 하셨다. 아직 겨울이 닥치지도 않았는데 이불을 당겨 옆구리를 감싸곤 하시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 암탉들이 마지막 남은 수탉과 이별한 지 2년여. 처음엔 꽤 우울해하는 게 눈에 띄었다. 잊고 있다가 겨울이 다가오니까, 떠날 날이 가까우니까 옆구리가 시린 모양이다. 저녁 늦게 방문한 나를 보고도 닭들이 횃대에서, 사과 상자 위에서 겨우 미동만 한다. 유정란을 생산하던 때가 아련한가 보다.



저 강물은

어디로 가는가

거슬러 오르면

물고기의 모천을 알 수 있듯이

본향은 어렵지 않게 찾게 될 것이다

반항아들이 엄마 품 안을 탈출하여

저벅저벅 걸어 나올 때처럼

샘물은 자유를 만끽한다는 명분으로

강에서 또 다른 강과 합류하여

험로인 줄도 모르고 겁도 없이

길 위에 선다

하나같이 히어로의 꿈을 안고

길을 나섰지만 오래지 않아

망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만다

바다에로의 길이 막혀 있었다

기형 물고기들이

괴물로 탈바꿈한 상어가

높은 벽을 쌓았다

영문은 알 수가 없다

저 강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로 흐르는가

        --<내일은 해가 뜬다>



  "형님, 이 아이 나와 닮았니껴?"

  "......"

  스마트폰 바탕 화면을 열어 내 턱에 들이대고 다짜고짜 물어오는, 모르는 사내 때문에 몹시 당황했다.

  "형님. 야, 말이시더. 내 닮았니껴, 안 닮았니껴?"

  "닮았니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일낼 것 같아 엉겁결에 툭 던졌다. 사진 속 녀석이 훨씬 잘 생겼구먼 싶었다. 내게만 묻는 게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남들은 익숙하게 '닮았구먼, 닮았어'를 연발한다.

  그 사내가 불편한 몸에 어눌한 발음으로 시내까지 태워 달라고 했다. 택시비는 외상이었다.

  사연을 알고 나니 짠했다. 10여 년 전에 희귀병을 앓았고, 사선을 넘나들다가 지금은 많이 호전됐다는 것이다. 걷지도, 말을 할 수도 없었는데 이젠 불편하지만 혼자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됐다. 십수 년 전 여자를 만나 동거 중에 아이가 태어나 현재 6학년이다. 아이가 젖떼기도 전에 남자가 발병하자 여자는 떠나버렸다. 이 아이가 본인 아이가 맞는지 의심이 된다고 동네방네 호소하고 다니고 있는 녀석은 알고 보니 지역 사회 한참 아래 동생뻘이었다. '야가 날 닮았니껴, 안 닮았니껴?' 처음 보는 사람이거나 아는 사람한테도 만날 적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버스를 이용하기보다는 택시 이용이 손쉬운 그는 아이와 함께 택시를 탈 때도 있었다.

  "형님 야가 날 닮았니껴, 안 닮았니껴? 솔직히 말해 보이소."

  "닮았네. 자네를 쏙 빼닮았구먼. 코도 오뚝, 긴 얼굴도 닮았고...."

  아이는 우리 대화에 둔감했다. 스마트폰 속만 뚫는다. 이젠 택시비 외상이 적은 편이다. 고구마로 대신 택시비를 내기도 하지만.

  그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기라도 하는 듯 잠자거나 운동할 때만 골라 호출한다. 오늘도 모자라는 수면을 보충하기 위해 오수에 들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집에 태워달라고 막무가내다.

  "유전자 검사를 해 보려 해도 돈이 없어 못 하니더."

  "그걸 해서 뭣하게? 자네를 닮았다니까."

  "만일 내 아이가 아니면 그 여자한테 데려다줘 버리게요."

  "큰일 날 소리. 그동안 키운 세월이 얼만데... 여자가 어디 사는지 알기나 하고?"

  "몰라요."

  "자네 아이가 틀림없다니까."

  오늘따라 결연한 택시가 그의 집 마당에 당도했다. 그가 때마침 지나가는 트럭을 불러 세운다.

  "형님, 형님..."

  "닮았어. 제 할머니를 닮았다니까."

  그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이 돌아왔다. 내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제 할머니를 더 많이 닮았어. 그게 정답이네."

  그는 비닐하우스 안의 두 덩이 수박 중 한 덩이를 내게 주었다. 아이 머리만 했다.

  그의 집 앞 벼는 고개를 푹 숙이고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속내는 까 보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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