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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운 Jun 07. 2024

종말론적 신비주의자, 콜럼버스의 흔적을 찾아서

스페인 여행 (2015.6.11 ~ 6.18)

@배대웅 작가님께서 추천해 주신 주경철 교수님 저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나온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종말론적 신비주의자' 역시 주경철 교수님께서 명명하신 것입니다.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2015년의 스페인 여행.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 스페인. 가장 기대한 것은 당연히 메시를 포함한 MSN(메시, 수아레즈, 네이마르)이 활약하던 FC 바르셀로나 경기 관람이었다. (메시 경기 관람기 : 링크) 그다음으로는 가우디의 건축을 보는 것도 있었고, 고야의 작품을 보는 것도 있었고, 알함브라 궁전에 가는 것도 있었지만, 바로 이 사람. 


'종말론적 신비주의자, 콜럼버스'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도 상당히 기대되는 일이었다.

대항해시대 빠로서 스페인가서 콜럼버스를 안 보고 올 수 없지 않은가?

(대항해시대 관련 글 : 링크)


콜럼버스는 우리가 위인전에서도 자주 볼 정도로 친숙한 인물이다.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콜럼버스의 계란'으로도 유명한 그는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최초로 건너 신대륙을 발견한 인물이다. 그의 항해로 세계 여러 문명이 교류할 수 있었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번성의 시대가, 누군가에게는 착취의 시대 말이다.


이런 콜럼버스가 종말론적 신비주의자라니?


그가 왜 종말론적 신비주의자인지 알아보기 전에, 

스페인에서의 그의 흔적을 먼저 찾아가 보자.




누구도 시도 못한 대서향 항해를 성공시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92년 8월, 콜럼버스는 역사적인 항해에 나선다. 긴 항해 끝에 아시아라고 끝까지 믿은 신대륙을 마침내 발견하고 가을에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신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그는 도착과 동시에 전유럽의 스타가 된다. 스타가 된 그가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달려간 곳은, 본인을 믿고 후원을 해준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 1세. 이때 왕을 알현하기 위해 걸어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계단이 바르셀로나 왕의 광장 티넬 홀 앞에 위치하고 있다. 


* 위 내용에 대한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많다. 당시 왕실 부부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여기에서 콜럼버스와 왕실의 부부가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콜럼버스가 된 심정으로 계단을 오르며, 과연 약 500년 전 콜럼버스의 심정은 어땠을지,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왕과 여왕의 심정은 어땠을지 상상해 본다. 


콜럼버스가 오른 계단에서 그를 생각하며


콜럼버스가 이처럼 그간 아무도 시도하지 못한 역사적인 업적을 달성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콜럼버스가 위인이라서? 아니면 성인이라서? 


대항해시대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분인 서울대 주경철 교수는 콜럼버스가 가지고 있던 이중적인 동기가 신대륙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가한다. 자신의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세속적인 동기와 함께, 신의 계획을 실현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했기에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주교수는 평가하고 있다. 


콜럼버스는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종말론적 태도에 심취해 있었다. 콜럼버스는 신의 계획을 실현하는 대리인으로 그가 지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항해로 세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계 제국이 건설되고, 예수가 재림하여 인류는 첫 출발지인 낙원으로 복귀하고, 최종적으로 종말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굳은 신념이 있어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항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콜럼버스가 광인은 아니었다. 당시 중세 유럽의 기독교 전통, 특히 스페인의 종말론적 사고를 대표하는 인물이 콜럼버스이다. 그가 당시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신념이 더욱 굳건하였고, 항해술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콜럼버스의 항해로 유럽의 중세는 종장으로 향하고, 근대를 열어갈 채비를 한다. 이런 그를 주경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근대 세계의 도래를 예견하고 준비한,

  중세의 예언자이자 활동가"





유럽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던 콜럼버스의 1차 항해와 달리, 2차부터 4차까지의 항해는 실망감만을 안겨주었다. 콜럼버스가 상륙한 곳이 인도라는 증거는 나오지도 않았으며, 금을 발견하지도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원주민과 갈등으로 많은 이들이 사망하고, 콜럼버스의 항해는 막을 내린다. 신대륙으로의 길은 열었지만, 이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콜럼버스는 1506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생전의 콜럼버스가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신대륙을 전전했던 것처럼, 그의 유해 역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 당초 그의 유해는 스페인에 있었으나, 1537년 도미니카로 옮겨지고, 프랑스가 이 섬을 점령하자 쿠바로 옮겨진다. 그러다 쿠바마저 독립을 선언하자, 그의 유해는 세비야로 돌아와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된다. 


현재 콜럼버스 무덤은 세비야 대성당에 위치해 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그의 유해가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한다) 대성당 내에서 콜럼버스의 무덤은 네 명의 기사가 관을 들고 있는 장엄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기사는 각각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왕국을 상징하며, 콜럼버스의 업적과 그의 탐험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항상 이러한 조각상에는 전설이 있다. 발을 만지면 복이 온다는.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관을 들고 있는 앞선 기사 중, 한쪽의 발을 만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세비야에 다시 오고, 다른 기사의 발을 만지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둘 중 나의 선택은? 둘 다! 양쪽 기사의 발을 열심히 만졌다. 


스페인 땅에 묻히기 싫어 하늘에 떠 있는 콜럼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이다. 1892년 시카고에서 열린 엑스포에서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 4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아주 성대하게 열린다. 콜럼버스를 찬양하며, 그의 항해와 업적을 기념하는 다양한 기념품과 행사들이 마련되었다. 이는 콜럼버스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각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그를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의 교류를 촉진한 위대한 탐험가로 평가하는 당대 시선을 알 수 있다. 


반면, 콜럼버스의 신대륙을 향한 첫 항해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1992년의 기념행사는 상대적으로 조촐했다. 많은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항해가 원주민들에게 미친 부정적인 영향, 특히, 식민지화와 원주민 학살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했다. 


지금도 여전히 대항해시대를 연 콜럼버스에 대한 시선은 엇갈린다. 멕시코시티에 1877년부터 우뚝 서 있었던 콜럼버스 동상은 시위대의 항의로 철거되었다. 시카고 역시 2020년 콜럼버스의 동상 2개를 임시로 철거하고 모든 기념물의 적절성을 재평가하겠다고 발표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람블라 거리에도 140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온 콜럼버스 동상이 있다. 이 동상 역시 꾸준히 철거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래서일까? 밤에 본 콜럼버스 동상의 모습은 쓸쓸해 보이기만 하다.


바르셀로나 콜럼버스 동상




오랜만의 여행기입니다 :)


바르셀로나에서 콜럼버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고딕지구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콜럼버스의 흔적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더라도, 고딕지구 관광은 강추드립니다. 그곳은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로 인상 깊었습니다. 중세의 스페인에 온 것만 같았거든요.


세비야는 고즈넉한 느낌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콜럼버스가 목적이 아니라도 꼭 방문하는 곳이 세비야 대성당인데요. 대기 줄이 꽤 길긴 하지만, 성당도 아름답고, 주변의 풍광도 좋습니다. 세비야 관광도 꼭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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