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와일드 로봇>
2024년 하반기를 뒤흔든 화제작은 누가 뭐라 해도 넷플릭스에서 독점 공개한 <흑백요리사>이다. 흑과 백의 계급으로 나뉜 셰프들이 펼친 요리 서바이벌은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여기 출연한 셰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스타덤에 올랐고, 그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은 예약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셰프들만큼이나 화제에 오른 인물은 심사위원이다. 특히, 미슐랭 3 스타 셰프인 안성재의 냉철하면서 카리스마 있는 심사는 프로그램 인기에 한 몫했고, 그가 남긴 심사평인 '이븐'은 새로운 밈이 되었다.
흑백요리사에는 대한민국 최고 셰프들이 만들어 낸 온갖 음식이 등장한다. 파인 다이닝 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 요리부터, 최고의 중식 대가들이 만들어 낸 진기한 음식들, 프로그램 시청만으로는 맛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기한 요리도 다수 등장한다. 하지만, 이 수많은 최고급 음식을 제치고 안성재 셰프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셰프는 바로 '급식대가'이다. 급식대가는 실제 학교에서 15년 간 급식을 담당하다 얼마 전 정년퇴직한 조리사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다른 셰프들과는 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다.
급식대가가 쟁쟁한 셰프를 제치고 안성재의 맘에 쏙 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급식대가의 음식이 가장 인상 깊었다며, 심사를 위해 음식을 먹기 시작했을 때, 멈출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다른 음식들은 조금씩 먹으며 심사했던 것과 달리 급식대가의 음식을 먹을 때 그는 허겁지겁 먹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성재는 급식대가의 음식에서 따뜻함을 느꼈다고 했다. 흔한 재료로 익숙한 맛의 음식을 만들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는 진심이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는 그. 어릴 때 먹은 따뜻한 밥 한 끼가 생각이 나 행복한 마음까지 들었다는 그는 온갖 산해진미를 제치고 가장 흔한 소재의, 가장 흔한 맛을 가진 급식 음식을 최고로 꼽았다.
2024년 하반기, 영화계에서도 나름의 화제작이 개봉을 했다. 기대보다 큰 흥행을 하고 있으며,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는 영화 <와일드 로봇(Wild Robot)>이 바로 그것이다. 드림웍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인 와일드 로봇은 동화 작가 피터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와일드 로봇>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드래곤 길들이기>를 제작한 크리스 샌더스가 메가폰을 잡았다.
우연한 사고로 야생에 불시착한 인공지능 탑재 로봇 '로즈'. 그가 사고로 불시착한 곳은 인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거대한 야생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동물들의 행동을 배우고, 그들과 소통하며 언어를 익힌 로즈는 점차 야생에 적응해 나간다. 그러다 우연히 홀로 남겨진 아기 기러기 '브라이트빌'의 보호자가 된다.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나 도태될 위기에 놓인 아기 기러기 브라이트빌을 돌보며 로즈는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 이 영화는 인공지능 로봇이 감정을 배운다는, 그것도 아이를 돌보며 사랑의 감정을 깨닫게 되는 흔한 설정을 다루고 있다. 인공지능 소재의 영화에서 이미 클리셰로 많이 등장해 지겨울 정도의 소재이다. 하지만 흔한 소재도 혼을 담아 만들면 특별한 요리가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준 급식대가처럼, 와일드 로봇은 흔한 AI 소재도 맛있게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우선 이 영화는 인공지능 로봇인 로즈가 감정이라는 것을 느껴가는 여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기존 영화들과 달리 로즈는 인간과 조우를 통해 감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야생 세계에서 감정을 배운다. 여러 동물들과 교류하며 인간이 이미 프로그래밍해 놓은 상황과는 다른 환경에 노출되고, 여기서 생명, 그리고 관계의 의미를 깨달아간다.
특히, 선천적으로 몸집이 작게 태어난 미숙아 '브라이트빌'과 만남은 로즈의 인생, 아니 로봇생을 바꾸게 된다. 브라이트빌은 태어나자마자 로즈를 마주하게 되고, 처음 본 개체를 엄마로 인식하는 기러기의 특성상, 로즈를 엄마로 알고 따르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엄마의 역할이 처음인 로즈이기에 엉뚱한 실수를 많이 하게 되고, 브라이트빌 역시 성장해 나가며 다른 기러기와 다른 자신을 보며 방황도 많이 하게 된다.
인간이 없는 야생에 던져진 인공지능 로봇. 그리고 부모를 잃은 아기 기러기를 길러야 하는 로봇. 하지만 양육 과정에서 마주하는 자연의 가혹한 현실. 이렇게 살짝 변주를 주었기 때문에 인공지능과 감정이라는 익숙한 설정을 다룸에도 다른 영화와 달리 풍부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었다. 여기에는 제작진의 섬세한 디렉팅도 한 몫한다. 처음 로봇 로즈가 등장했을 때는 차가운 기계음으로 틀에 박힌 이야기만 한다. 하지만 점차 인간적인 따뜻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변해가며, 로즈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단순 기계에서 마음을 가진 기계로 진화하는 과정이 어색하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영화 초반부는 밝고 귀여운 분위기이다. 한 폭의 그림이 정말 살아 움직인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잘 어울리는 영상미는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섬의 풍광은 화사하고, 등장하는 동물들은 하나같이 귀엽다. 말 그대로 따뜻한 감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중반부부터 분위기가 바뀐다. 역시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이 등장하고 현실 세계의 어두운 면이 나타난다. 이 부분 역시 흔하다면 흔한 소재이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인간이라는, 인공지능이 오히려 더 선하다는 프레임은 그간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다룬 바 있다.
하지만 와일드 로봇에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은연중에 보여줄 뿐이다. 담담하게 그려낸, 하지만 뒷배경에서 나타나는 현실 세계의 어두운 면은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영화 중반부에 나오는 철새의 비행 장면에서 별도의 언급은 없지만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가 수면 아래에 잠긴 채로 나온다. 또한, 야생의 동물들은 동면조차 불가능할 만큼 혹독한 겨울을 보내게 된다.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로 발생한 지구 온난화가 이미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해졌음을 은유로 보여준다.
또한, 스포일러라 자세히 언급은 할 수 없지만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대결 장면 역시 인간 세계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기술과 자연의 대립, 인공지능과 자연의 대립,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라 볼 수 있는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통해 인공지능 시대가 펼쳐진 미래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결국 이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흔한 소재를 혼신의 힘을 담아 요리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촌스럽지 않고 따뜻하게 그리면서 명작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극중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인공지능 로봇과 동물이지만, 이들은 누구보다 인간스럽다. 미숙하고, 자주 실수하고 좌절도 한다. 하지만, 학습을 통해 성장해나가고 새로운 감정을 배워나간 이들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시련을 극복한다.
영화에서 로봇 로즈가 자주하는 대사이다.
"Sometimes to survive, we must become more than we were programmed to be"
"때로는 살아남으려면, 프로그래밍된 자신을 뛰어넘어야 해"
로봇이라는 한계를 가진 로즈. 작은 날개라는 한계를 가진 브라이트빌. 태생적 한계를 극복해낸 이들의 여정에 전세계는 감동하고 있다. 흥행 성공은 물론이고 평론가로부터도 극찬을 받는다. 2024년 최고의 애니매이션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아카데미상 애니메이션 부분도 <인사이드 아웃 2> 독주 체제에서 접전 양상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영화를 드림웍스 역사상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당연히 후속작도 발표되었다.
국내에서도 최근 개봉한 기대작들의 평이 엇갈리는 가운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와일드 로봇이 잠시나마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흔한 재료로도 특별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 영화 와일드 로봇. 강력 추천!
지난 주말, 아이와 극장에서 <와일드 로봇>을 봤습니다. 요즘 아이가 로봇 홀릭이라 별 기대 안하고 봤는데, 제가 엄청 감동 받았네요. 저희 앞에 앉아 계시던 엄마와 초등학교 딸 두 명은 펑펑 눈물을 쏟을 정도로,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정말 흔한 대사인데. 누구나 예상 가능한 흔한 대사 그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 정도입니다.
하지만 T로 의심되는 우리 아이에게 영화 어땠냐고 물어보니, 로봇이 팔 벌리고 뛰어서 웃기다는 감상평을 남겼습니다. 저런 감상평이 나온 장면은 아래 장면인데요. 이 장면도 엄청 감동적인 장면인데 이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