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I 워페어

대포왕이 보여준 민간 군수산업의 서막

하지만 20세기는 정부 주도의 기술 개발이 대세

by 최재운

1870년 9월 1일 새벽, 프랑스 세당(Sedan) 근교의 안개 자욱한 들판이 굉음으로 진동했다. 프로이센군의 포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프랑스군이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적의 포병대가 보이지 않았다. 포탄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쏟아졌다. 당시 프랑스군의 청동 대포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날아온 것이다.


결국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백기를 들었다. 10만 명의 프랑스군이 항복했고, 황제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 제2 제정의 몰락이었다. 이 충격적인 패배의 배후에는 한 민간 기업가가 있었다. 바로 ‘대포왕(Kanonenkönig)’ 알프레드 크루프(Alfred Krupp)였다.


크루프는 원래 숟가락이나 포크 같은 식기를 만들던 작은 공장주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야망이 있었다. 최고 품질의 강철을 만들어내는 것. 당시만 해도 대포는 청동으로 만드는 게 상식이었다. 강철은 너무 단단해서 가공이 어려웠고, 균일한 품질을 보장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크루프는 20년 넘는 연구 끝에 마침내 완벽한 주강(鑄鋼)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강철제 강선포(크루프 대포)를 프로이센군에 대규모로 공급하였다. 그의 강철포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청동포보다 가벼우면서도 더 강력했고, 무엇보다 포신 뒤쪽에서 포탄을 장전하는 후장식 구조로 제작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이 포구로 힘겹게 화약과 포탄을 밀어 넣는 동안, 프로이센군은 레버 하나로 신속하게 재장전했다. 사거리 역시 프랑스 사거리 역시 프랑스 청동포의 2,500~2,800미터에 비해 크루프 포는 3,500미터 이상이었다. 프랑스군은 사거리 밖의 적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tempImagebi1xX8.heic
tempImagepg7nbP.heic
대포왕 알프레드 크루프 / 태평양전쟁에 사용된 크루프포


세당 전투 이후 크루프의 이름은 전 유럽에 알려졌다. 각국 정부가 앞다퉈 그의 대포를 주문했다. 러시아 차르도, 오스만 제국 술탄도, 심지어 패전국 프랑스까지도 크루프제 대포를 샀다. 에센(Essen)의 작은 공장은 어느새 2만 명이 일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크루프는 자신의 공장 도시에 노동자를 위한 주택과 학교, 병원까지 지었다. 마치 작은 왕국 같았다.


하지만 크루프의 성공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만든 대포는 결국 사람을 죽이는 도구였다. 1차 세계대전 때는 그의 후계자들이 만든 420mm 초대형 포 '빅 베르타(Big Bertha)'가 벨기에 요새들을 무너뜨렸다. 파리를 포격한 초장거리포, 일명 '파리포(Paris Gun)' 역시 크루프제였다. 2차 대전 때도 독일의 전차, 야포, 대포는 물론 유보트까지 130척이나 생산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동시에 수백만 명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비난도 피할 수 없었다. 종전 후 크루프 경영진은 전범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재산 몰수 처분을 받은 이도 있었다.




크루프의 사례는 민간 기업이 전쟁 기술 개발에 참여하여 역사를 바꾼 경우였지만 극히 이례적이었다. 그의 대포 역시 결국 각국 정부가 전략적으로 채택하고 활용했기에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기술 개발 자체는 크루프 사의 업적이지만, 그 기술을 대량 생산하고 전장에 투입한 주체는 국가였다. 근현대 전쟁 기술의 발전사는 대부분 정부와 군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원자폭탄 개발에는 무려 13만 명이 동원됐고,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8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금액이 쏟아졌다. 로스앨러모스의 비밀 연구소부터 테네시의 우라늄 농축 시설, 워싱턴의 플루토늄 생산 공장까지, 미국 전역에 걸친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민간 기업은커녕 웬만한 국가도 엄두를 낼 수 없는 규모였다.


반도체의 역사도 비슷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정부와 군대에서 반도체를 구매하지 않았다면, 반도체 산업 자체는 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냉전의 상징과도 같은 ICBM이나 핵잠수함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한 발에 도시를 날려버리는 미사일, 몇 달간 잠수한 채 대양을 누비는 잠수함. 이런 무기들은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야만 개발할 수 있었다. 소련은 우주 개발을 포기하면서까지 핵잠수함 건조에 매달렸고, 미국은 복지 예산을 깎아가며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구축했다. 초강대국조차 숨이 막힐 정도의 투자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은 군사 기술들은 결국 민간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원자력은 전기를 생산했고, 반도체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만들었다. 미사일 기술은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파괴를 위해 태어난 기술이 문명의 도약대가 된 것이다.


3차 산업혁명 파트에서 주요하게 다룬 DARPA는 정부 주도 기술 개발의 정점을 보여줬다. 이들이 만든 아르파넷, GPS, 스텔스 기술, 드론 등은 현대 문명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기술들의 공통점은 처음에는 군사 목적으로 개발됐다가 나중에 민간으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핵전쟁에서도 살아남을 통신망으로 시작했고, GPS는 미사일을 정확히 유도하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실제로 GPS는 걸프전 당시 군사 전략의 정밀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걸프전에서는 군사용 GPS 장비가 부족해 민간용 GPS 장비를 대량으로 사용해야 했다. 당시 민간용 GPS는 선택적 가용성(SA, Selective Availability)이라는 의도적 오차 삽입으로 최대 100미터 정도의 오차가 있었다. 하지만 걸프전을 계기로 SA 제거에 대한 요구가 지속적으로 나왔으며, 결국 2000년 5월 1일 클린턴 대통령이 SA를 완전히 해제하면서 민간도 수 미터 수준의 정확한 GPS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지금의 정밀한 내비게이션과 위치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부가 먼저 개발하고, 통제하고, 필요에 따라 민간에 개방하는 방식. 이것이 20세기 기술 혁신의 철칙이었다. 정부의 손에서 태어난 기술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거쳐 천천히 민간으로 흘러들었다. 이런 압도적 성과 덕분에 이코노미스트지는 DARPA를 '현대 세계를 설계한 기관'이라고까지 평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나 민간 기업이 홀로 전쟁의 판도를 바꾼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기술은 곧 권력이었고, 권력은 국가가 독점했다.


하지만 21세기의 들어 이 견고한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실리콘밸리의 차고에서, 대학 기숙사에서, 심지어 십 대들의 방에서 세상을 뒤흔들 기술들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제는 SNS에서 농담을 던지다가 로켓을 쏘아 올리는 괴짜 CEO가, 벤처캐피털의 지원을 받는 스타트업이, 전쟁의 미래를 좌우하는 시대가 열렸다. 국가의 독점이 무너지고, 민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또 브런치에 소월 했습니다. 학교 일도 바쁜 데다가 매주 1~2회 외부 특강이 있다 보니 진득하게 집중을 할 수가 없네요. 그리고 12월 말에 출간될 책 교정 작업도 있었고요.


이 글은 12월에 출간될 <인간 없는 전쟁: 두려움도 분노도 없는 AI 전쟁 기계의 등장> 1장 초고 중 일부입니다. 초고라 살짝의 문장 수정을 한 후, 출간되겠지만 내용적인 변화는 크게 없을 예정입니다.


출간 전까지는 초고 내용 중 흥미로운 부분을 발췌해서 업로드하도록 하겠습니다.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K-방산, AI는 잘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