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메르인 Jan 29. 2024

생애 최초로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다

고수는 기술을 연마하면 중원으로 진출코자 하는 유혹을 느낀다. 달리기를 시작하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 경로의존성이 존재한다. 뛰기 시작한 지 한 달 밖에 안 됐지만 이 기세를 몰아 대회에 나가고 싶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마라톤대회가 존재한다. (1) 지역이름(혹은 주최기관)+ (2) 대회 특징+(3) '마라톤대회'를 조합하면 수백 가지의 대회가 가능하다. 이를테면 "평양 쌈장아가씨 마라톤대회" 같은 식이다. 내가 이번에 참가한 대회는 "(1) 아시아투데이 (2) 사회공헌 (3) 마라톤대회"다. 그 앞에 '부산엑스포 유치 기원을 위한'과 '제1회'가 첨언돼 있다.


왜 이 대회를 선택했나? 3대 마라톤인 동마(동아일보 마라톤), 제마(jTBC 마라톤), 춘마(조선일보 춘천마라톤) 같은 유명한 대회는 몇 달 전에 신청이 마감된다. 코스도 최소 10km다. 나는 겨우 3km 정도 달려봤을 뿐이었다. 아시아투데이 마라톤대회는 5km 코스가 있었고, 다행히 열흘 전까지 신청을 받았다. 1회인 데다가 추석 연휴기간에 개최되어 신청이 저조한 모양이었다.


대회는 일요일 10시 출발이었다. 9시까지 집합하라고 안내를 받았다. 남편은 30분 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초초한 마음에 몸이 빨랐던지 9시 10분에 도착해 버렸다. 번호표를 배부받고도 출발이 한 시간 가까이 남아 할 일이 없었다. 일행도 없던 터라 한강 둔치 쪽으로 걸어가 스트레칭이나 하고 있었다. 


여의나루역 이벤트 광장 양쪽으로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한쪽에서는 현장 등록자를 위해 매직으로 번호표를 쓰고 있었다. 저쪽에서는 무릎과 발목에 테이핑을 받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의 줄이 길었다. 대회 취지를 반영하듯 부산엑스포 홍보부스도 하나 있었다. 얼핏 보면 무슨 축제 같았다. 축제가 아닐 리 없다.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잡담을 주고받았다. 몸을 풀기 위해 가볍게 달리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는 사람들, 여자친구의 사진을 찍어주는 남자들이 보였다. 


다들 번호표를 가슴에 붙이고 다녔다. 종목별로 색깔이 달랐다. 10km는 살색, 5km 달리기는 노란색, 5km 걷기는 파란색이었다. 마라톤 대회는 계급이 존재한다. 10km 출전 선수를 보니 괜히 주눅이 들었다. 10월임에도 소매가 없는 상의와 핫팬츠를 입은 참가자는 고수의 냄새가 풍겼다. 


출발선 쪽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사회자가 어떻게든 시간을 메우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사전에 신청받은 가족 5팀이 차례대로 장기자랑을 했다.


"여러분! 출발시간이 아직 남았으니까 천천히 하세요!"


가족 장기자랑이 신속히 끝나자 상품이 남았다며 즉석에서 장기자랑 참가자를 모집했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사회자는 앞줄 참가자 몇 명을 붙들고 즉석 인터뷰를 시도했다. 


"연휴인데 왜 이 대회에 참가하셨어요?"

"........"


연휴에 왜 이 대회를 개최했는지를 먼저 설명하는 게 순서다.


5km 코스는 여의나루역 이벤트광장을 출발하여 여의 IC에서 반환한다. 아직도 출발선 앞 도로는 차들이 쌩쌩 달렸다. 출발 직전에 통제하나? 그러고 보니 도로통제 안내문 같은 것도 없고. 


아니다, 이 대회는 도로를 통제하는 게 아니었다. 한강 자전거도로로 달리는 거였다. 모든 마라톤대회는 도로를 통제하는 줄 알았던 나의 오해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대회는 손에 꼽는다. 


출발시간이 가까워오자 몸이 가볍게 떨렸다. 사람들이 출발선으로 몰려들었다. 페이스메이커들이 달고 있는 노란 풍선이 여기저기 떠 있었다. 9시가 되자 사회자의 구령에 맞춰 모두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5! 4! 3! 2! 1!"


어디선가 징소리가 들렸다. 10km 선수들이 먼저 출발했다. 5km는 시차를 둔 뒤 차례가 왔다. 뒤쪽에 서 있었기 때문에 바로 출발하지 못했다. 앞줄에 위치한 주자들이 빠르게 치고 나갔다. 5km 코스는 기록측정칩을 안 주기 때문에 기록을 스스로 쟀다. 재빨리 나이키 러닝 앱의 시작버튼을 눌렀다. 내 페이스에 맞춰 무리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제치고 튀어나갔다. 


1km가 지나자 주위에서 걷기 시작했다. 선두그룹과는 딴 세계다. 나는 느리지만 일정한 속도로 뛰었다. 걷는 사람들을 둘셋쯤 제쳤다. 그들이 다시 뛰기 시작하자 나를 제쳤다. 그들이 걸으면 내가 제쳤다. XX과학고 학생, 보라색 바지를 입은 중년 여성, 흰색 커플티를 입은 두 남녀 등이 나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줬다.


한참 동안 달리는 몸이 버거웠다. 완주할 수 있을까. 1~2km까지는 몸이 덜 풀려 힘들다는 건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1km마다 안내판이 있었다. 안내판을 하나씩 지나쳐 가면서 점점 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시야가 아득한 멀리까지 넓게 펼쳐졌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주변 경치가 나를 지나쳐갔다. 평소와는 조금 이질적인, 빠른, 일정한 속도였다.


반환점을 돌자 이젠 됐다고 느꼈다. 달린 거리보다 남은 거리가 짧다. 10km 선두그룹은 두 배 거리의 반환점을 벌써 돌아 나를 제치고 튀어나갔다. 


마지막 4km 안내판을 지나쳤다. 주변에서 속도를 올렸다. 나는 항속을 유지했다. 저 멀리 결승점이 보였다. 한 커플은 스마트폰을 들고 뛰며 도착 순간을 영상으로 담았다. 마지막 힘을 쏟았던지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사이를 지나쳐 나도 도착했다. 완주 순간은 극적이지 않았다. 그저 달리다가 멈출 뿐이었다. 


5km에 50분이 걸렸다. 빠르게 걸어도 나올 속도다. 최소한 한 번도 안 쉬고 뛰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도착 부스에 가니 기념품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받았다. 봉지 안에는 메달과 빵, 음료수, 부산엑스포 유치 기원 팜플렛이 있었다. 맞은편 부스에서 나눠주는 피자 한 조각을 받아서 먹었다. 메달을 목에 걸고 지하철을 탔다. 아무도 신경 안 쓰겠지만 이건 내가 이룩한 작은 조각의 성취다. 


경로의존성이 다음 목표로 이끌었다. 도로를 통제하는 제대로 된 대회에 나가고 싶다. 그러려면 10km는 뛰어야 한다. 1km도 못 뛰었는데 5km 대회에 나가게 됐다. 가능하지 않을까?




 P.S.: 올 봄에 교통 통제하는 대회에 나갑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