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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메르인 Jan 21. 2024

공간과 시선과 권력의 상관관계

세기말은 혼란스러웠다. 국가는 구제금융의 대가로 허리띠를 졸라맸고, 기업은 사람들을 잘랐다. 연도의 맨 앞자리가 2로 바뀌어도 종말은 오지 않았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직장이라는 피라미드의 바닥에 겨우 안착했다. 회사는 연수 프로그램에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다. 눈 덮인 마니산에 오르고, 양로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3주간의 지루한 신입사원 연수가 끝났다. 


"그래도 지금이 직장생활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일걸?" 


돌이켜보니 연수팀 직원은 진실을 말했다. 신입 직원들은 굳은 얼굴로 배정될 부서 발표를 기다렸다. 나에겐 이렇게 들렸다.  


"수메르 미결수, 해외영업부 근무 30년형에 처함." 


대기하던 선임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더니 앞장섰다. 초등학교 전학 갔을 때 심정과 흡사했다. 동급생들이 삼촌, 부모님 뻘인 점이 달랐다. 


부서 총인원은 삼십 명 남짓. 팀은 세 개. 부장은 오십 대, 나는 이십 대 중반이었다. 세대를 아울러 한 가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 상하관계가 확실히 구분되는 형태의 집단에 소속된 건 처음이었다.  


부서는 학교가 아님에도 학교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혹은 은행의 지점을 닮았다. 책상은 모두 출입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맨 앞줄에 사원들의 책상이 팀 구분 없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그 뒷줄에 과장, 차장들의 책상이 팀별로 둘씩 짝을 지어 있었고, 맨 마지막줄엔 팀장 책상이 있었다. 부장실은 한편에 따로 있었다.  


위치만 다른 건 아니었다. 팀장 자리는 성인 가슴 높이의 파티션이 앞과 양 옆을 디귿자 모양으로 감싸고 있었다. 과장이나 차장 역시 개별 파티션이 있었다.  


내 자리는 출입문을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사원 자리에는 칸막이 따위는 없었다. 책상의 방향 때문에 내 등뒤에 있는 부서원, 그러니까 모두는 내 뒤통수와 모니터가 보일 터였다. 농땡이를 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근무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느낌이었다. 


"과장님, 저도 벽 한 짝이라도 갖고 싶어요." 

"야, 그렇게 만만한 거 아니다. 나도 이걸 얻는다고 몇 년이 걸렸어." 


부장이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뭘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부장실은 유리로 된 신식 파티션이 아니라 그냥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용무가 있을 땐 노크를 먼저 해서 기척을 알렸다. 혹시 낮잠 중이면 깨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회사 맨 꼭대기는 임원층이었는데, 각 방마다 미묘한 기준으로 서열이 있었다. 크기부터 시작해서 전망의 종류(녹지뷰, 도로뷰), 세면실 여부, 동선 등에 따라 선호도가 매겨졌다. 지위가 높을수록, 지위가 같으면 선임일수록 좋은 방을 차지했다. 


십여 년 전, 회사가 리모델링을 하면서 자리배치를 획기적으로 바꿨다. 팀별로 직급에 무관하게 바둑판 모양으로 파티션을 설치했다. 차장이든 사원이든 동일한 사이즈의 공간을 배정받았고,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남들의 시선에 노출되었다. 팀장만 별도로 제일 안쪽에 자리를 배치했다. 부장실의 벽도 일부 유리도 대체되었다. 선임들은 아쉬워했다. 




예로부터 권력자들은 높은 위치에 거처를 정했다. 중세 유럽의 성이나 미국 할리우드의 부자들의 저택이 그 예다. 우리나라도 진짜 부자들은 성북동, 평창동 같은 언덕 위에 단독주택을 지어 산다. 위층의 층간소음에 시달린다거나 택배가 옆집으로 잘못 배달될 일은 없을 것이다.  


권력의 핵심은 프라이버시이고 그 수단은 시선이다. 나는 너를 볼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볼 수 없어야 한다. 시선의 방향을 돌리도록 강제하거나, 물리적으로 벽을 만들면 된다. 사무실의 파티션은 단순한 벽 한 짝이 아니라 권력의 한 조각이었다. 프라이버시가 생기면 정보의 흐름을 차단할 수 있다. 우리끼리 방에서 한 이야기는 남들이 들을 수 없다. 


'해밀턴'은 미국 건국의 주역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일생을 다룬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다. 등장인물 애런 버는 잘 나가는 해밀턴을 시기한다. 해밀턴은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과 함께 훗날 1790년 타협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협상을 한다. 애런 버는 자신도 저 방 안에서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고 싶다는 야망을 '그 일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s)'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드러낸다.


동기 K는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미니냉장고를 사서 집무실에 두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근무 중에 차가운 맥주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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