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스위트파크 소금빵집 베통
망설임은 자격에 대한 고민에서 온다.
'나 같은 중년여성이 오픈런을 해도 될까? 혹시 젊은이들의 전유물은 아닐까?'
대상은 초승달을 닮은 소금빵이다. 오픈런이란 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구매를 위해 달리는 걸 말한다. 국립국어원이 '개장 질주'라고 다듬었다. 명품 같은 희소하고 인기 있는 품목을 사기 위해 벌어진 현상이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지난 2월 국내 최대의 디저트 전문관인 '스위트 파크'를 열었다. 1600여 평의 공간에 43개 브랜드가 입점했다. 만원 남짓으로 즉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디저트 소비는 요즘 세대의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트렌드에 부합한다. 신상 디저트 먹기가 취미라고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동참의 의무를 느꼈다.
우선 매장을 둘러보며 탐색을 시도했다. 개장 한 지 몇 달이 지나 초기만큼 붐비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기가 심한 매장은 베통. 성수동에 있는 소금빵집이다. 하루에 다섯 번 빵이 나온다는데, 갈 때마다 대기줄 마감이었다. 언감생심이라 포기하려는 찰나.
하루 휴가를 쓰고 집에서 쉬던 어느 날. 문득 소금빵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가서 오픈런하면 사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주말은 사람이 훨씬 많아 난이도가 올라갈 테고. 다 젊은 사람들만 줄 서 있을 텐데 나 같은 아줌마가 가도 될까. 에라 모르겠다. 안 하고 후회하는 거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 일단 가보자.
스위트파크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지하 1층 식품관과 고속터미널 호남선인 센트럴파크 사이 공간에 위치했다.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도착하니 아홉 시 오십 분. 오픈된 공간이라 허리 높이의 접이식 바리케이드로 둘러져 있었다. 직원들이 분주히 오픈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을 찾으면 될 텐데...
'베통 구매장소'라는 입간판을 찾았지만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마,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건가.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성적이라 주목이 부담스럽다. 하지만 오픈런에 양보란 없다. 긴가민가하며 입간판 앞에 서니 곧 내 뒤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어느덧 줄은 수십 명으로 불어났다. 이쯤 되니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는 우월함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자... 구매 자격(?)은 확보했으니, 뭘 살지 고민만 하면 된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맛이 8가지 종류다. 플레인, 바질, 트러플, 무화과, 블루베리, 초코솔트, 참깨, 시아시드. 일인당 네 개까지 살 수 있고, 그중 같은 맛은 2개까지 가능하다.
열 시 십 분이 되자 바리케이드가 제거되었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매장 바로 앞에 대기할 수 있게 안내되었다. 혹시나 이동 중 새치기를 방지하기 위해 천천히 움직이게끔 했다. 한두 번 줄 서기를 시켜본 솜씨가 아니었다. 공정한 사회에 대한 신뢰감이 샘솟았다.
한 중년여성이 기웃기웃하더니 (맨 앞에 있어서 그런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난 오픈 전에 와서 줄을 설 수 있는 줄 몰랐네. 몇 시에 왔어요?"
"아, 네, 아홉 시 오십 분요."
"혹시... 플레인 맛으로 하나 사줄 수 있어요?"
"일인당 네 개 까지 살 수 있는데, 제가 다 살 거라서요."
이건 답이 정해져 있다. 뒤에 수십 명이 기다리는데 상도의를 저버리면 안 된다. 그 중년여성은 내 뒷사람에게 다시 자기 것도 사줄 수 있냐고 묻고 있었다.
드디어 열 시 삼십 분이 되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걷는 것처럼, 나는 원하는 맛을 전부 고를 수 있었다.
"플레인 두 개, 바질 한 개, 무화과 한 개요."
종업원은 주문을 복창했다. 빵 하나씩 기역자로 막힌 종이봉지에 담고 그걸 다시 큰 봉지에 넣었다. 봉지의 가장자리를 접어 스티커를 붙여 주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빵 네 개와 더불어 포스트카드 하나, 돌돌 말아 노끈으로 묶은 영자신문지 같은 게 들어있었다. 신문의 크기는 A4 용지보다 살짝 컸고, 내용을 보니 매장 소개였다. 이런 게 요즘 감성인가.
나는 바질맛을 골랐다. 빵은 다른 소금빵처럼 둥글지 않고 양 끝이 붙을 정도로 굽어진 초승달 모양이었다. 조금만 잘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음미했다. 여느 소금빵보다 밀도가 높고 버터맛이 많이 났다. 바질향도 겉돌지 않고 잘 어울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플레인 맛을 먹은 딸아이도 만족스러워했다.
"엄마. 맛있어요. 다음에 또 사 오세요."
"오픈런해서 사십 분 걸렸어... 다음엔 네가 줄 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