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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연 Apr 25. 2022

아빠 츄리닝을 입은 엄마

늦은 밤 용기가 필요할 때

고등학교 시절 입시 무용을 준비하던 나는 꽤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게 일상이었다.

5시 넘어서 학교가 끝나면 간단하게 분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바로 무용학원으로 달려갔다.

하루 4시간이 넘는 실기 수업을 하고 나면 밤 10시가 넘었다. 개인 레슨까지 있는 날은 11시를 

훌쩍 넘기는 날도 일상이었다. 지금이야 버스 어플에 택시 어플까지 안전하게 실내에 있다가 시간 맞춰

나가면 되지만 그 당시에는 버스 배차 시간도 일정치 않고 택시는 수월하게 잡히지도 않았다.

무용 학원과 집은 버스 한정거장은 걸어야 도착하는 거리였다. 

버스를 타기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운 애매한 거리라 나는 늘 걸어서 가는 방법을 택했다. 

11시를 넘기고 혼자서 걷는 한정거장의 거리는 꽤 길고 고요하고 움츠러들게 했다. 

그렇게 얼마간 늦은 귀가를 하던 중 도보로 귀가를 하는 상황을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엄마와 마주치며 

알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 부모세대는 지금처럼 주 52시간 근무시간이 적용되는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었다. 12시 다 돼서 퇴근하는 아빠의 모습은 너무 익숙했고 늦은 시간 끝나는 나를 데리러 올 수 있는 

역할을 맡은 엄마는 정류장 전부터 걸어오는 나를 보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셨다. 


지금도 나아진 것 없는 실상이지만 그 당시에는  사건 25시나 경찰청 사람들을 보면서 흉악한 범죄에 대한 

공포심을 최고조로 느끼고 몸을 사릴 때였고 실시간 SOS를 보낼 수 있는 핸드폰도 흔치 않은 그런 시대였다.  11시가 넘는 시간 한적한 밤길을 홀로 걷는 딸의 모습은 엄마에게는 지나칠 수 없는 걱정거리

 였을 것이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늦은 시간 실기 수업을 마치고 학원 문을 나섰을 때 저 멀리서 익숙한 걸음걸이로 

오고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가까워져서야 뭔가 이상한 옷차림을 보고 궁금함은 나중 문제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가 입고 오신 옷은 아빠가 휴일 즐겨 입으시는 군청색 비닐 소재 모자 달린 운동복이었다. 

아빠보다 작은 키에 아담한 체구의 엄마가 모자까지 쓰고 입으신 모습은 정말 어울릴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엄마는 뭔가 뿌듯한 얼굴로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아빠 운동복을 입고 오신 이유를 설명하셨다. 

멀리 서라도 누가 보면 체구 작은 남자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시각적인 혼란을 노리신 거였다. 

아빠의 운동복을 입고 팔도 더 크게 휘젓게 되고 걸음걸이도 보폭을 크게 하셨다고 흡족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전혀 그렇게 보여질 일 없을 텐데 엄마는 자신이 작은 키의 남자로 보였을 거라고 

확신하고 계셨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이유는 한 가지.... 엄마도 나만큼 밤길이 무서우신 거였다.

아뻐의 서걱거리는 비닐 운동복이 늦은 밤길 나를 데리러 오시는 엄마의 보호색이자 안전복 역할이 

되어주기를 바라신 거다. 


엄마와 팔짱을 끼고 오던 그날의 서늘한 밤공기와 굳건한 안도감 친밀했던 대화 그 모든 게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절의 젊고 생기 넘치던 엄마 모습도 실삔으로 무장한 올백 머리로 대입 실기를 앞둔 고민 많던 

여고생이었던 나의 모습도 많이 그립다.


그 후로도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실 때 아빠의 운동복을 자주 애용하셨다. 엄마만의 착각이라고 말려도 

엄마는 늦은 밤 딸의 귀가를 위해 맵시와는 거리가 먼 그 차림을 고수하셨다. 

그 시절 엄마 나이가 된 지금 나도 늦은 귀갓길을 걱정하며 아이를 마중하고 싶다. 그때의 엄마 마음을

느껴보고 추억을 되새기고 싶지만 현실은 취객도 피해 갈 정도로 큰 덩치를 가진 아들 둘의 엄마라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도 팔순이 넘은 엄마는 막내딸의  늦은 밤 홀로 하는 산책을 잔소리하고 말리신다. 덕분에 나는 오래전

서걱 거리는 운동복 입고 오시던 엄마의 그때 그 모습을 떠올리며 과거의 엄마 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엄마의 잔소리가 반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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