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여행
사진을 현상 안 한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한 달에 한번 usb에 저장된 사진 파일을
현상하는 게 습관처럼 꼭 해야 할 일이었는데 몇 해 전부터는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의 양도 현저히 줄었고 현상할 사진 고르는 일도 드문 일이 되어버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이가 더해질수록 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이 사진 찍히고 싶은 욕망이 많이 사그라지는 것 같다. 아니면 찍고 나서 고민 없이 지우는 사진 개수가 많은 게 이유일 수도 있겠다. 지난 주말 나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보관하고 있던 현상 사진들을 연도 별로 정리해보았다. 사이즈도 제각각이고 색감이 흐릿한 나의 초등학교 때 사진부터 지금 보면 기겁할 세기말 화장법으로 치장한 입술밖에 안 보이는 대학시절 사진들까지 정리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릴 수 있었다. 사진 속의 나와 친구들은 지금보다 더 화려하고 최대한 나이 들어 보이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지금 보니 어설픔이 8할을 차지하는 앳된 20살을 갓 넘긴 대학생의 모습이다. 시간 별로 분류하다 요즘 보면 빈티지 래트로풍 주류로 관심받을 사진들을 발견했다.
최초의 일탈을 저지른 고3 여름방학 무용학원 동기들과 합숙훈련이라는 미명 아래 떠난 바닷가 무계획 여행사진이었다. 매일 머리 한올 내려오지 않게 빈틈없이 묶고 묶은 말총머리에 망을 한번 더 씌우는 작업을 거쳐야지만 무용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늘 규율에 길들여져 있던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기찻길과 모래사장에서 한껏 멋을 부린 포즈로 웃고 있던 사진들을 보니 그때의 여름 본격적인 휴가철 전이라 서늘하고 한적했던 여름 바다가 어제 일처럼 생각이 났다. 자는 시간 빼고는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실기 연습에 열중하느라 지칠 대로 지치고 막연한 불안감에 예민하고 우울해있던 그 해 여름방학 전부터 작전을 세웠을 거다. 목소리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친구의 전화 한 통으로 엄마를 속이는 완벽 범죄를 해결하고 3박 4일을 함께 할 동기 4명과 망상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숙소는 물론이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슨 용기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지금도 그 당시 겁도 없고 무모한 세상 경험 없는 고3 여고생인 내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다. 민박집을 찾아다니며 4명이 함께할 비좁은 숙소를 얻고 각자 준비해온 재료와 최소한의 조리도구로 고추참치와 김을 곁들여 설익은 밥을 해 먹고 날만 밝으면 바닷가로 달려가 어둑해질 때까지 놀았던 그때의 친구들과 나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그해 여름의 바닷가 사진을 보면서 무모함이 안겨준 추억이 있음에 일탈을 계획하고 주도했던 나의 용기에 작은 찬사를 보낸다.
그 시절 여행이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계획으로 떠났던 여행이었음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 듯하다. 지금의 나는 낯선 곳으로의 짧은 외출에 있어서도 내가 들를 곳의 카페나 음식점 고객 리뷰를 꼼꼼히 살핀다. 그런 과정이 없이는 못 미더움에 선뜻 움직여지지 않는다.
다수가 검증한 곳만 가려는 4.0 이상의 리뷰를 쫒는데 익숙해진 지금의 나에게 오래전 기억 곳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한 번의 여행이지만 순수하고 무지해서 경험해 볼 수 있었던 그때의 기억들이 여름이 가까워질 때마다 시간을 되돌려서 한 번쯤 가고 싶은 그리움을 느낀다.
당장 다가오는 여름휴가부터 틀에 박힌 습관을 조금씩 지우고 준비와 계획 없이도 낯선 곳에서 평점을 넘어서는 감동과 설렘을 느끼고 진득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해보는 시도를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