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겨울 따스한 햇살의 등쌀에 못 이겨 호숫가로 나갔다. 커피 한잔을 들고 호수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형물과 건물들의 반영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태블릿을 켜고 떠오르는 것들을 썼다. 호수, 나무, 겨울, 새……. 집이 아닌 곳에서 혼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격 탓에 약속이 있는 것처럼 서둘러 짐을 챙겼다. 몇 발자국 갔을 때, ‘저기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맑고 높은 억양이었다. 내가 아주 갖고 싶은 ‘솔’ 음의 서울 말투. 가방이 열렸을까, ‘도(道)’를 물어보려는 걸까,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니 여자가 모자를 들고 서 있었다. 나는 모자를 건네받고 목례를 했다.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글을 쓰시나 봐요.”
상냥한 목소리의 여자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까부터 봤어요. 멋져요.”
핵심만 간단히, 단어로만 말을 하는 여자의 얼굴을 그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높고 맑은 ‘솔’ 톤의, 전형적인 서울 말투의 목소리와는 달리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편안함을 주는 인상인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표정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여자는 명품 그 자체였다. 명품을 잘 모르는 나조차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명 브랜드의 제품을 둘렀다. 그녀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나는 낯선 이와의 대화가 편치 않아 다시 한번 목례를 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동네 마사지숍이었다. 다리 통증이 점점 심해져 힘들어하던 즈음 친구가 추천해 준 곳이었다. 친구는 주 선생을 추천했지만 주 선생은 인기가 많은지 예약이 어려웠다. 처음 간 날 만난 마사지사는 성형보다 정형이라며 한 시간 내내 정형론을 펼치며 자기에게 계속 마사지를 받으면 건강해질 거라 했다. 두 번째 만난 마사지사는 마사지로 근육을 풀 수는 있지만 근육을 만들어줄 수는 없다며 운동을 권했다. (즉각 운동을 등록했다.) 이번엔 어떤 분일까 엎드려 생각했다.
“어디가 제일 아프세요?”
저음의 건조한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종아리요. 종아리가 너무 아파요. 골반도 조금 아프고.”
보통 이렇게 말을 하면 근육이 많이 뭉쳤다, 비정상적인 몸매다, 이렇게 심각한 사람은 처음 본다와 같은 익숙한 대답이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말 없이 마사지를 시작했다.
“압은 괜찮으세요?”
“네.”
또 말이 없었다. 마사지를 자주 받아본 건 아니지만 말 없는 마사지사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뜨거운 수건으로 종아리를 마무리한 후 돌아누워 눈을 뜬 순간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스카프부터 운동화까지 명품을 둘렀던 그녀는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흔히 찜질복이라 부르는 분홍색 상하의.
연락은 그녀가 먼저 해왔다. 목요일이 휴무인데 그날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주 선생’이라 부른다고 했다. 호숫가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먼저 말을 걸고 살갑게 다가오려는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마사지숍에서 그녀는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일까 헷갈렸다. 가정에서와 직장에서의 얼굴이 다르듯 그녀도 그런 것이리라 생각했다.
명품 로고가 빛나는 스카프에 핸드백, 패딩점퍼에 굽이 높은 운동화 차림이었다. 화려함이 잘 어울렸다. 다소 과하게 느껴질 정도의 짙은 화장 속에서 그녀는 나를 보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나란히 호수 산책길을 걸었다. 그녀는 스무 살 때부터 25년 동안 쉼 없이 일을 해왔다고 했다. 세신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마사지까지.
“맨몸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옷도 입고 일해요.”
그녀는 가지런한 윗니가 드러나게 웃었다.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타고난 손맛 덕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남편도 있고 아이도 둘이 있지만 직업 때문인지 친구를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글도 쓰고 싶고 그림도 그리고 싶고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하루종일 일을 하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도 했다.
“지난번 호수 벤치에 앉아있는 언니 되게 근사해 보였어요. 부럽더라. 그런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마사지야 말로 아무나 못하지,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어.”
마사지숍에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그녀는 말을 많이, 잘했고, 가끔 웃었다. 하루종일 힘을 써야 하는 일이다 보니 일에 집중하느라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우린 참 달라. 언니는 자유롭고 나는 갇혀있어. 언니는 꾸미지 않아도 빛나는데 나는 명품을 걸쳐도 내 몸에서는 늘 싸구려 오일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멋지다니, 나도 아무것도 아닌 그저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일 뿐이다. 세신을 하는 동안 실력이 좋아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했지만 목욕탕의 뜨거운 습기 때문에 온몸이 불었다고 했다. 남의 몸은 깨끗하게 해 주지만 정작 자기 몸에 있는 때는 벗겨내기 힘들었다고.
“내 이름은 진주에요. 그래서 주선생이지. 엄마가 진주처럼 빛나게 살라고 지어준 이름인데 실상은 조개껍데기만도 못하게 살아.”
진주의 눈이 붉어졌다가 이내 하얘졌다. 표정이나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했다.
“언니 처음 봤을 땐 겨울 끄트머리였는데 벌써 꽃이 지려고 하네. 화려한 시절은 참 짧아.”
“꽃이 져야 열매를 맺는다잖아.”
“열매를 맺겠죠. 나도… 가끔 연락해도 되죠? 친구…. 해줄 거죠?”
나는 끄덕 답했다.
진주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불편할까봐, 아니 내가 불편해서 일부러 목요일에 예약을 잡았다. 마지막 벚꽃마저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렸다. 나무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문득 진주가 보고 싶었다.
“주 선생님에게 받고 싶어요.”
“주 선생 일주일 전에 관뒀어요.”
근처 다른 마사지숍에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되어 갔다고 했다. 원장은 꼭 주 선생에게 받고 싶다면 옮긴 곳을 알려줄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연락이 올 것이다.
그녀가 화려한 꽃을 벗고 옹골찬 열매로 살아가기를, 껍데기를 벗고 진주로 빛나기를 바란다. 호숫가에 머무르던 흰 새가 또다시 푸드덕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