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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부른곰 Mar 22. 2020

2-5. 런던, 대영박물관 피쉬앤칩스

모든 날이 좋았다.

꼭! 대영 박물관에 가보고 싶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유물로 가득하다는 영국 박물관은 동경의 장소였다. 고민하다가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 내가 아이들을 끌고 다니면서 차근차근 설명하며 둘러볼까 했지만, 가이드를 따라다니면 효율적으로 관람할 수 있고 내가 놓치는 것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 너무 얇고 자극적인 설명만 하면 불만스럽기도 한데,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가이드 투어는 일장일단이 있다. 시간이 많으면 가이드 투어 한 번 하고, 차근히 시간을 내서 한번 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둘러보는 것이 이상적인 관람 방법일 것 같다.


거리에서 본 특이하게 생긴 간판. 정체를 모르겠다. 약국은 아닌 것 같고, 펍인가..


박물관에 일찍 도착했더니 시간이 남아 둘째 아들과 아내는 영국 박물관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 갔고, 큰 아들과 나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어젯밤에 비가 와서 공기가 상쾌했다.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큰 아들과 한 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거리를 걸었다. 같이 웃고, 떠들며, 가위바위보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을 한 대 씩 때려는 놀이를 하면서 돌아다녔다. 이게 굉장히 무식한 놀이기는 한데, 남자아이들과 놀 때는 그럭저럭 재미있다. 눈치 싸움을 잘해야 하고, 감정 컨트롤도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고도의 전술을 요한다. 처음부터 세게 때리면 뒷감당이 안된다. 때릴 때는 눈치 보면서 살살, 맞을 때는 웃으면서 조심조심, 누구든 아프다고 이성의 끈을 놓으면 부모 자식 사이라도 의가 상한다. 아들이 나를 때릴 때면 한결 같이 말했다. 아들로서 도리를 다 해라. 패륜을 저지르지 마라. 너의 용돈은 내가 준다. I am your father.


킹스맨이 들고 다닐 법한 우산을 팔았다. 하나 사려고 했는데 아들이 "설마 made in china"는 아니겠지?"라며 웃는다. 아쉽게도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시간이 되어 돌아와 보니 아내는 스타벅스의 아메리카노와 씨름을 하고 있다. 아메리카노 벤티를 시켰더니 세숫대야만 한 놈이 나와서 치열하게 이걸 다 먹냐, 마느냐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니 한국에서는 그란데도 크다고 안 먹는 사람이 여기서는 왜 그걸 시켰냐고 물으니까, 몰랐단다. 한국에서도 자주 먹는 스타벅스인데 왜 그걸 왜 모르냐고 재차 캐묻듯 물었더니, 점원이 영어로 뭐라고 하는 지를 몰랐다고 수줍게 말한다. 아…. 그런 아픔이. 게다가 테이크아웃하는 To go라는 말이 생각 안 나서, 그냥 세숫대야 같은 머그컵에 받아서 먹고 있다고 하는데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커피를 들고 밖에 나올 수 없었구나. 부부가 동변상련하는 영어의 아픔을 영국에서 매일 맛보고 있다. 괜찮다. 이게 마지막이다. 오늘이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대영 박물관


대영 박물관은 훌륭했다. 박물관을 좋아해서 이곳저곳 많이 다녀봤지만 최고 중에 최고였다. 시설도 좋고, 유물도 많고, 관리도 잘되어 있다. 그럼에도 박물관 입장료는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처럼 무료다. 위키나 블로그 등 인터넷에 떠 도는 정보로는 외국 유물이 너무 많으면 유료 입장을 시킬 수 없다는 국제 박물관 협회의 규정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영국 박물관의 무료입장 때문에 발생하는 적자에 대해 국가 보조금을 계속 주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의가 영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있는 것으로 봐서는, 박물관 무료입장은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처럼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국제박물관 협회 ICOM나, 박물관 헌장을 뒤져 봤지만 해당 규정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영국 박물관의 유물 중에 영국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박물관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외국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이었다.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 대영박물관


우리한테는 영조 35년, 그러니까 1759년, 영국의 의사이자 탐험가, 모험가, 식물학자인 한스 슬론이 아프리카와 중동, 그리스 등을 돌아다니며 평생 모았던 외국 유물 79,575개를 전시하면서 영국 박물관은 태어나게 된다. 태생부터 외국에서 가져온 것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었다. 이후 영국이 대영제국 시대로 거듭나면서 외국의 유물들이 급속도로 영국으로 들어오게 (돈 주고 사 오고, 빼앗아오고, 훔쳐오고 -.,-) 되었고, 나중에는 너무 많아져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 수 차례 증축하였고, 남아도는 문화재들은 여러 번 국립도서관과 자연사박물관, 인류사 박물관 등 다른 곳으로 돌렸음에도, 그래도 유물이 자꾸 들어와서 건물을 새로 짓는다. 현재는 약 800만 점의 유물이 있다고 한다. 대영 박물관의 지구 유일 라이벌인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이 40만 점인 것에 비추어 보면 어마어마한 양이다. (자기네 보물만 모아 둔 바티칸 박물관, 대만 고궁 박물관 등과 루브르, 대영 박물관은 장르가 다르다. 대영 박물관의 진정한 호적수는 루브르 밖에 없다.) 박물관의 정식 이름은 영국 박물관 The British Museum이지만, 대영 박물관 The Great British Museum이라고 불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대영 제국시대를 거치며 박물관이 현재의 세계적 규모로 커왔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한테 문명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늘 선사시대를 상상해보라고 한다. 팬티만 입고 우가우가 하면서 나무 창으로 멧돼지를 사냥하며 돌아다니던 옛날 옛날에, 지구에 큰 광명이 비추더니 세계 곳곳에서 천재들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돌덩어리를 녹여 청동기를 만들고, 농사를 짓고, 돌로 집을 만드는 방법을 발명해낸다. 심지어는 글자까지 만든다. 아마 특허권이 있었다면 이들은 빌 게이츠를 능가하는 천문학적 부를 가졌을 것이고 인류 최초의 갑부가 되었을 것이다. 청동 기술과 농업기술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문명을 낳게 된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도시가 생기고, 공통된 관습과 체계를 만들어 국가를 이룩한다. 위대한 인간의 문명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에는 비슷한 시기에 여러 개의 문명이 생겨난다. 우리가 아는 4대 문명의 시기, 마야 문명까지 포함하면 5대 문명의 시기다.


수메르 문명의 문자판.  출처 : 영국박물관 https://www.bmimages.com/index.asp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간의 가장 오래된 문명은 수메르 문명인데, 여기는 단군 할아버지가 한반도에 터 잡으신 기원전 2333년보다 무려 3500년 전인 기원전 6천 년경에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거의 단군할아버지의 단군할아버지 급이다. 이 사람들 건국 신화도 우리와 비슷해서, 하늘에서 인간을 불쌍히 여겨 신관 50명과 함께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내려와 터 잡고 나라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문명이 얼마나 대단하냐고 하면, 다른 지역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구석기시대를 살며 팬티도 안 입고 사냥하며 동물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조금 문명이 발달된 지역이라고 해 봐야 팬티 한 장만 입고 돌 깎아서 화살촉 만들고, 돌도끼로 나무 베던 신석기시대였다. 이 시기에 최첨단 인간 문물인 청동기를 도입하고 도시를 만들고, 심지어 문자까지 만들어 버린다. 거의 외계 문명 수입 수준이다. 그러고 보니 얘네들 건국신화도 우주에서 신이 내려온 건데. 설마?


수메르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분류한다. 수 천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 그러니까 지금의 중동 지방에 수많은 왕조와 도시국가가 생겨났다가 멸망했다가를 반복했다. 이 문명들통틀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부른다. 수메르 문명이 탄생하고 한 2천 년 뒤에 이집트 문명이 생겨난다. 두 문명 사이는 수천 킬로 떨어져 있지만, 지구에 대화가 가능한 상대는 서로 밖에 없기 때문에 (중국의 황하 문명과 인도의 갠지스 문명이 있지만 이웃으로 삼기엔 좀 멀다.) 이 두 문명은 무역도 하고 교류도 하고, 전쟁도 하면서 친해지기도 하고 원수처럼 지내기도 하면서 발전해 나간다. 이 두 문명 중간에서 중계무역하던 에게문명(복잡한 미로에서 미노타우로스에게 공주를 구해내는 그리스 신화의 미노스 왕국이 에게문명의 한 부분이었다)은 훗날 그리스 문명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리스 문명은 로마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쳐 서양세계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인간다운 인류의 시작이며, 인간 문명의 처음인 것이다. 당시 유물들이 이집트와 중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영국 박물관에 있다. 5천 년 전 수메르인들이 기록한 도판부터,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이야기를 담은 문서, 이집트 문명을 여는 비밀의 열쇠였던 로제타스톤까지, 어마어마한 것들이 이곳에 모여 다. 정말 놀라울 정도다. 한 자리에서 인류 문명의 시작을 감상하고 느낄 수 있다. 관람자에게 축복이다.


감탄했던 유물들


너무 많은 유물이 있어 꼬집어 꺼내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아시리아 전시관의 부조는 음미하면서 돌아보기를 권한다. 가이드 투어를 따라가면 자세히 설명해 준다. 장면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있고, 문화가 있었다. 3천 년 전에 만들어진 부조는 너무나 정교했고 생생했다. 책에서 봤던 라마수 석상도 여러 개를 볼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이집트 전시관에서는 람세스 2세의 흉상이 보였다. 우와. 이것도 엄청 컸다. 람세스 2세가 누구냐면, 모세가 성경의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탈출할 때 모세를 공격했던 그 왕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것처럼 못난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집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왕이다. 본래는 전신 상이 었는데, 가져오기가 힘들어서 얼굴과 가슴 부분만 떼어 가지고 왔다고 한다. 가슴에 뚫린 구멍은 들고 오려고 파낸 것이다. 여기에 나무 막대기를 넣어서 운반했다고 한다. 람세스 흉상 말고도 많은 유물들에 구멍이 나 있었다. 이것도 운반을 위해 뚫어 놓은 것들이다. 그 구멍들을 보니, 이곳에서 관람할 수 있어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이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최근에 IS와 탈레반이 종교 원리 주의를 주장하며 수 천년 전 만들어진 자기네들 유물 등을 파괴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라마수와 많은 석판 등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걸 생각하면 어떻게든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했다. 나중에 루브르 가면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우리도 프랑스에 외규장각 의궤를 빼앗긴 적도 있다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람세스 2세


10여 년 전 갈가메쉬 서사시에 빠져서 관련 도서를 몇 권 구입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팠을 때가 있었기에, 눈에 보이는 모든 유물들이 소중했다. 보고 싶었던 것들을 관람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 감사했다. 아시리아 전시관을 지나면서 굉장히 벅찬 감정까지 느꼈다. 이걸 볼 수 있다니. 이런 마음이었는데 문제는 아이들도 벅차 했다는 것이다. 아빠 힘들어, 배고파, 다리 아파. 아이들은 이 거대한 박물관 자체를 벅차 했다. 쩝. 가이드 투어는 이게 문제다. 효율적이고, 설명도 좋지만, 단체 일정에 우리 시간을 맞추다 보니 우리의 컨디션을 놓쳐버린다. 가이드 시간에 맞춰 휴식을 취해야 하고 화장실에 가야 한다.


대영 제국 시대의 영국 사람들은 적당히를 몰랐던 것 같다. 적당히 한 두 개씩 유물을 가져오는 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신전을 통째로 뜯어 가지고도 온다. 유시민 작가의 쓴 유럽 도시기행을 보면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신전 내부영국인들이 다 가져가 볼 것이 없고, 대영 박물관에 더 볼 것이 더 많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전 껍데기는 그리스에 있는데, 대부분의 내용물은 18세기에 영국 대사가 통째로 가져와서 파르테논 신전 내부와 똑같은 크기의 전시실을 만들어 그대로 전시해 놓았다. 저절로 아, 미친! 소리가 나왔다.


파르테논 신전과 똑같은 방을 만들어 놓았다. 장식물은 전부 진품이다.


한참을 둘러보다 보니 벌써 1시 가까이 되었다. 정말 계속 보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너무 성화라 더 이상 박물관에 있기 힘들었다. 아무리 이게 뭐고, 저게 뭐고를 말해 봐야 안 먹히고, 나중에 너네가 돈 벌어서 오려면 힘들 거고, 친구랑 와도 마음 안 맞으면 구경하기 어렵다고 얼러봐도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올 수밖에.


모아이 석상


피쉬앤칩스와 생선가스


밖에 나오니 아이들은 이제 배가 고프다고 난리다. 조금 미안했다. 내가 좋아서 아이들에게 소홀했던 기분이다. 뭘 먹을까? 아내가 피시앤칩스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근처에 맛집이 있단다. 피시앤칩스? 이름은 거창하지만 생선에 튀김옷 입혀서 만드는 음식이다. 생선가스와 큰 차이 없다. 나는 생선 가스를 싫어한다. 나 중학교 때던가. 어머니가 1년 정도 영등포에서 생선 가스 공장에 다니셨다. 80-90년대는 급식 시대가 아니었다. 학교에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어머니는 일 끝나면 남은 생선 가스를 얻어 오셨는데, 그걸 도시락 반찬으로 싸 주셨다. 한 1년 정도? 1년 반? 하여간 200-300일 정도,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긴 기간 쉬지 않고 생선 가스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 갔다. 지겹기 그지없었다. 점심시간에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뚜껑을 열려고 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생선 가스를 보면 눈물이 났다.


눈물 젖은 생선 가스를 먹어 봤는가? 하도 자주 먹었더니 나중에는 그걸 먹으려면 머리까지 아팠다. 요즘 아이들한테는 어떤 지 모르지만, 생선 가스는 당시 중학생들에게 최고의 반찬이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내 반찬을 하나라도 먹으려고 난리가 났었다. 심지어는 내 생선 가스 한 조각을 얻어먹으려다가 싸움이 난 적도 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지났을까. 어느 날부터인가 반 친구들도 내 생선가스를 먹지 않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지겨워진 것이다. 또 언젠가부터 점심시간이 되어도 내 주위에 모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다른 아이가 생선 가스를 도시락으로 가져와도 아무도 먹지 않았다. 생선 가스는 일종의 안전지대였다. 혼자서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아무도 쳐들어오지 않는. 중립국 같은 반찬이었다. 그리고 30년 정도 지난 지금까지 나는 생선 가스를 안 먹는다. 심지어 당시 내 옆자리에 앉았던 짝꿍도 그 뒤로 평생 생선 가스를 안 먹고살고 있다고 했다.


영국에서 제일 유명한 음식이 피시앤칩스라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이 나라 국민들은 위대한 영국으로 존재하는 동안 무엇을 한 것인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모두 번영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찬란한 식문화를 만들어냈다. 하나씩 소개할 필요도 없이 이름만 들어도 입맛을 다지게 만드는 대표적 음식들이 있다. 그런데 영국은 피시앤칩스라고? 생선 튀긴 거? 런던 박물관에 유물 채우느라 바빠서 먹는 것까지는 신경을 못 썼나 보다. 하. 그래도 영국에 왔으니 먹어 봐야지.


다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얼굴 나온 사진 밖에 없어 사진을 많이 잘랐다


Rock and Sole Plaice


그래서 찾아간 곳은 150년 정도 된 레스토랑이었다.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피쉬앤칩스 전문점이다. 유명해서인지 웨이팅이 조금 있었지만, 다른 데 가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라 기다렸다. 사실 배가 고팠다. 시간도 늦은 데다가, 아침부터 돌아다닌 거리가 꽤 되었고, 아침 식사도 부실했다. 고소한 튀김 냄새에 침이 고였다. 그래서 그런가, 피시앤칩스는 굉장히 맛있었다. 마음으로는 좋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바삭한 튀김옷 안의 도미의 생선살이 부드러워서 입에서는 잘 받아들여졌다. 인지부조화를 느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거다. 아이들도 굉장히 잘 먹었다. 애들은 생선 튀긴 것이라고 해서 동태전을 상상했다고 했다. 일단 비주얼에서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감자칩도 엄청 컸다. 큰 아들 말로는 여기 감자칩 하나면 롯데리아 감자튀김 1인분은 될 거라며 감탄했다. 감자 칩도 겉은 바삭하게 튀기고 속은 감자 특유의 부드러움을 남겨 놓아서 식감이 좋았다. 큰 아들은 영국에서 먹어본 식사 중에 최고를 어니스트 햄버거로, 둘째 아들은 서로인 스테이크를 꼽지만, 아내와 나는 여기 피시앤칩스를 꼽을 정도다. 1인당 하나씩 시켰는데 많을 거라는 서빙 보는 중국 아주머니의 우려와는 달리, 남김없이 다 먹었다.


런던 15번 버스


밥도 먹었겠다, 숙소까지 일단 걸어가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박물관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이들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코번트 가든에 가서 아내는 쇼핑을 좀 했고, 아이들과 나는 애플 스토어에 들어가서 맥북과 아이패드를 가지고 놀았다.


호텔 가까이 왔더니 들어가기 싫었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아쉽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15번 버스를 타고 런던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첫날 했던 투어에서 가이드가 15번 버스는 런던의 중요한 코스를 다 지나다니기에 한 번 정도 타는 것도 괜찮다고 했던 말을 아내가 생각해 냈다.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오는 중간에 런던 타워 정도에서 내릴 계획이었는데, 버스가 생각보다 멀리 갔다. 런던을 빠져나가 한참을 갔다. 구글 맵이라도 꺼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도시에서 그냥 내렸다.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는데 다들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별 일이 다 있네. 이런 분위기였다. 다시 15번 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에 런던 타워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어느 새에 둘째가 잠이 들어 있다. 피곤했나 보다. 고민하다가 큰 아들과 아내만 내리고 내가 둘째 데리고 숙소로 들어와서 식사 준비를 했다. 마지막 저녁이라 나가서 먹을까 했지만 점심을 늦게 먹은 데다 간식도 많이 주워 먹어서 간단히 먹기로 했다. 런던은 마지막이지만, 다른 일정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저녁 먹고,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나는 또 혼자 나왔다. 영국까지 왔는데 펍에는 가 봐야지. 어제 저녁에 아내와 호텔 옆 셜록홈스 펍에 가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포기했다. 봐 둔 곳이 있었다. 셜록 홈스 펍 옆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가다 보면 시장 같이 생긴 쇼핑센터가 있고 그 옆에 작은 펍이 하나 있었다. 근처에 갔더니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실내에는 자리가 없어 다들 플라스틱 컵에 맥주 한 잔 씩 들고 계단 같은 곳에 앉아서 먹고 있었다.


펍에서 마지막 한 잔


가게에 들어가서 주문하려고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의외로 경쟁전이었다. 인터넷에서 주문하는 방법을 검색해 보고 갔다. 테이블에 앉아서 테이블 번호를 기억한 다음 웨이터에게 테이블 번호와 주문 내용을 알려주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일단 테이블에는 자리가 없고, 여기저기서 주문하고 술을 받고 떠드는 통에 웨이터 얼굴 보는 일도 힘들다. 머뭇거리는데 옆에 선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얼굴 빨갛고 배가 볼록 나오고 머리 숲의 노화가 나와 비슷하게 진행된 걸로 봐서, 나를 동료(?)로 생각해 말을 건듯했다. 그런데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내 썼지만 영국 영어는 영 듣기가 힘들다. 그냥 쏘리, 아이 캔 낫 스피크 잉글리쉬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는 지금 말은 영어 아니냐고 영어 할 줄 아네 이러면서 웃는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오직 아이 캔 낫 스피크 잉글리쉬 이 말만 할 줄 안다고 했다. 시끄러운 와중에 주위 아저씨들 몇이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분위기가 좋다. 허, 이런 사장님 개그에도 웃네? 그 아저씨가 나에게 종이와 펜을 건넸다. 적으라는 거다. 그래, 이거였어. 에일 파인트라고 적어서 웨이터한테 주니 웨이터가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굿. 미션 성공이다. 맥주를 받았더니 아까 그 동료(?)가 어디서 왔냐고 말을 건다. 이건 내가 우려했던 상황이다. 영국인이 나에게 말을 거는 상황. 펍에 갔으면 그 정도는 생각했어야지 하겠지만,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간 거다. 술만 먹고 오려고 했다. 코리아라고 말했더니, 속사포처럼 떠든다. 자기는 런던 축구팀 풀럼을 좋아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풀럼이었단다. 모태신앙도 아니고 모태팬이라니. 그런데 풀럼은 2부 팀 아닌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건방지게 질문해서는 안된다. 대화가 복잡해지더라. 여기까지다. 바이. 그래도 고마웠다. 보통은 동양인 아저씨한테는 관심을 1도 안 보이는데, 신경도 써 주고 말도 걸어주는구나. 진짜 고마웠다. 쌩큐. 행복하시라. 그렇게 맥주 한 잔 들고 펍에서 나오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펍 주변만 시끄러웠지, 몇 발자국만 벗어나면 조용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홀짝홀짝 맥주를 마셨다. 이렇게 영국 여행이 끝나는구나. 이 밤이 런던의 마지막이구나. 아쉬움도 조금 들고, 기분이 이상했다.




떠나며


본래 런던은 계획에 없었다. 그 시간에 프랑스 남부를 더 돌아보거나, 스페인을 넣으려 했었다. 돌이켜보면 영국 런던 여행은 잘한 일이었다. 내가 가 봤던 다른 유럽 도시들보다 깨끗했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스위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안전했다. 영어 문제가 다른 나라보다 유난히 걸리긴 했지만, 일단 내 말은 알아들었기 때문에 일방적인(?)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음식은 생각보다 맛있었고, 날씨도 걱정보다 나쁘지 않았다. 저녁마다 나는 혼자 나와 템즈강을 걸었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좋았다. 싸늘한 겨울 강바람을 맞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시간은 꽤 고즈넉한 기억이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최고였다. 오래간만에 머릿속에다가 영양제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뮤지컬과 축구경기를 못 봐서 서운하기는 하지만, 뮤지컬은 본래 안 보던 것이고, 축구는 편하게 앉아 맥주 마시면서 보는 게 최고다. 아쉬울 것 없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좋았다. 가슴 한편에 감정이 차서 뿌듯했다. 이렇게 영국의 마지막을 보내는구나. 런던을 위해, 마지막 밤을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가로등 불빛을 향해 컵을 들어 건배를 했다. 안녕.


다음날 우리 가족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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