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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푸른 Dec 22. 2023

오트밀 쿠키

올리볼 Oliebollen

첫째가 올리볼을 먹고 싶단다. 올리볼은 네덜란드의 겨울철 별미다. 밀가루 반죽을 한 스쿱 덜어 뜨거운 기름에 튀겨내고 고운 설탕가루를 묻혀 먹는다. 할 일도 없는데 잘됐다. 다 같이 시내에 나가 점심도 때우고 시간도 때우면 되겠다.


근데 난 바깥 주전부리를 먹고 싶지 않다. 달고 느끼한 걸 먹으면 먹을 땐 좋은데 곧 침이 끈적해지고 속이 느글거린다. 하지만 때는 점심 직전. 점심 계획 없이 올리볼 주문대에 서면 '어쩔 수 없이 이게 내 점심이군' 하고 반짝 좌절할 것이다. 그리곤 어쩔 수 없이 먹는 상황을 환영하며 한 개면 족할 걸 두 개, 세 개 시키게 되겠지. 


점심을 아예 해결하고 나가자. 저번에 왕창 요리하고 남아 냉장고에 보관한 파스타를 꺼내 데웠다. 어제 만든 뱅쇼 한 잔을 끓여 곁들이니 근사한 간단 밥이 되었다. 냉장고에 들어간 음식은 안 먹게 될까 봐 꾸역꾸역 먹곤 했는데 이렇게 요긴하게 먹을 수 있다니! 오늘을 참고하여 미래엔 남은 음식을 입이 아닌 냉장고에 좀 보냈으면 좋겠다.


남편과 아이 둘은 와플과 올리볼을 사 먹고 나는 안 먹었다. 안 당긴다. 점심을 미리 먹어 올리볼의 유혹을 차단하니 주도면밀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된 것도 같다. 다들 다 먹을 때까지 무심해함에 성공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 하다가 보드게임을 사러 서점에 갔다.


지하와 1.5층에 달하는 규모 있는 서점이다. 지하에 어린이 책과 보드게임이 있는 곳에 가니 색칠놀이를 할 수 있는 테이블과 어린이 손님용 책들이 여러 권 있다. 네덜란드에 살며 새로운 장소에 가면 작게라도 어린이 맞춤의 공간을 꾸려놓은 걸 보게 된다. 병원, 비자 오피스, 은행, 도서관, 시청 등 곳곳에서 반갑게 발견했다. 사회에서 가장 여린 존재를 공간까지 지정해 환영하는 걸 보면 덜 여린, 또 여려질 예정인 나도 분명 미움받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이 두 애를 보는 사이에 보드게임 두 개를 후다닥 골랐다. 첫째는 책 구경 조금 하다 지루해한다. 둘째는 색칠공부에 빠져서 여념이 없다. 첫째는 집에 간다 해서 남편이 데리고 가고 나는 둘째 옆에 앉아 핸드폰으로 책을 읽는다. 둘째가 갑자기 근처에 온 어린이 이름을 부른다. '요나!' 요나도 둘째를 알아보았다. 어떻게 아느냐 물으니 한글학교 친구란다. 뒤이어 요나의 네덜란드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도 만났다. 얼굴만 아는 분들이다.


요나 엄마가 책을 보러 간 사이 요나 아빠와 스몰토크를 했다. 알고 보니 나와 같은 회사에 다니고 일로 실낱같은 연결고리가 있었다. 국제 부부가 된 연유도 들었다. 사연 없는 부부는 없겠지만 국제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면 8000km의 거리를 극복하게 만드는 사랑에의 의지와 단 한 사람으로 뒤바뀌는 운명 같은 걸 생각하게 된다. 많은 것을 감수한 커플은 감수했음이 사랑의 증표가 되어 더 단단해질 것 같다. 감수한 만큼 자신과 상대의 사랑력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고. 


커피 한 잔 하자고 하셨다. 이 서점은 지하 한가운데에 커피숍이 있다. 두 부부가 자리를 잡는 사이에 주문하러 갔다. 둘째가 소시지빵을 사달라 했다. 주문을 어떻게 하지. 처음 본 사인데 저 집 커피를 내가 살 것까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우리 애만 소시지 빵 사 먹이긴 좀 그렇다. 애들까지 모두 다섯 명이니까 쿠키 두 조각을 더 시켜야겠다. 쿠키 안 당기는데. 게다가 한 조각에 2.3유로이네. 4.6유로 안녕...


뒤이어 요나 엄마가 주문하러 왔다. 뭐 더 시키실까 봐 쿠키 두 개 시켰다고, 나눠먹자고 했다. 음료와 쿠키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둘째는 홀로 소시지 빵을 먹고, 어른들과 요나는 음료를 마셨다. 쿠키에 아무도 손을 안 대길래 내가 먹지 않아서인가, 아님 권하지 않아서인가 싶었다. 할 수 없이 쿠키 하나를 쪼개 먹으며 다른 쿠키를 집어 권했다. 그러니 요나 아빠가 점심을 많이 먹어서 괜찮다고 했다. 들었던 쿠키를 내려놓았다.


덩그러니 남은 쿠키와 권했다 막힌 내 마음이 부끄러워서 쿠키를 조금씩 집어 먹었다. 먹으며 생각했다. 

1. 나/내 아이만 챙겨도 된다.

2. 고로, 내 아이만 챙기는 데서 오는 민망함은 불필요하다.

3. 혹시 쿠키가 잘 먹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4. 하지만 쿠키가 잘 안 먹혔을 때의 민망함을 감수할 만큼의 이득인가?

5. 나는 그냥 안 주고 좀 인색해지는 편이 나은 것 같다. (사실 인색한 것도 아니다.)

6. 번외로 부부처럼, 주는 사람 생각해서 먹지 않아도 된다.


내 손만 닿은 쿠키는 고대로 남았다. 돈 주고 산 게 아까워 냅킨에 싸서 고스란히 가져왔다. 집에 와 쿠키를 으적으적 다 먹었다. 민망함도 먹어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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