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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푸른 Dec 29. 2023

나이롱 고사

새 차 기념, 네덜란드에서

장장 7개월을 기다린 차가 온단다. 이민온 후 3년 만에 갖는 차다. 그동안은 차 없이 충분히 살만했다. 자전거 도로가 잘 발달해 있고 아이들이 작고 가벼웠기 때문이다. 이젠 많이 커서 무겁고 넘어질까 무섭다. 차를 살 때가 되었다.


차를 사자니 고려사항이 많았다. 네덜란드는 주변 유럽국에 비해 휘발유값이 비싸다. 환경규제 때문에 취득세도 세다. 휘발유 차를 근미래에 퇴출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퇴물이 될 듯한 휘발유차를 구매하기가 꺼려진다. 전기차는 세제혜택이 있고 구매 비용 일부를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었다(이제 과거형). 아직은 못 믿겠다. 신문물을 보면 의심부터 하는 타입. 슬로우아답터인 나는 좀 더 사용 케이스가 축적되고 불편사항이 개선된 뒤 사고 싶다. 


우리의 결정은 새 휘발유 차를 6년 간 리스. 리스 기간을 6년 이상으로 늘려야 월 납부액이 최소가 된다. 차종은 기아 NIRO. 색깔은 추가 비용이 없는 흰색. 운전 젬병인 나를 고려해 풀옵션. 연간 주행거리를 5000km로 하고, 세금과 유지보수와 보험을 포함해서 509유로인데 남편 말로는 아주 좋은 조건이란다.


올해 5월에 신청했다. 신청하면 바로 나올 줄 알았는데 연락이 없다. 10월, 11월, 12월 계속 늦춰진다는 연락만 받다가 드디어 받을 날이 되었다. 남편이 딜러에게 가서 차를 모셔왔는데 싱글벙글이다. 요즘 차 너무 좋다고. 


그냥 차를 타기엔 뭔가 의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안 하기엔 좀 찝찝하다. 한국에서도 중고차를 사고 약식으로 고사를 지냈었다. 엄마가 시켜서 하고, 하면서도 뭐 이런 걸 하나 했는데. 막걸리를 네 바퀴에 붓고 나니 그게 뭐라고 우리를 지켜줄 것 같았다. 


막걸리를 붓는 것과 무사고 사이에 과학적인 인과관계는 없을 것이다. 그냥 인간으로서 소원을 빌고, 정성을 들이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은 거다. 믿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고사를 지내기로 한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상에 돼지머리, 명주실, 삼색나물, 북어, 시루떡 등등 올라가는 것도 많다. 상 위에 초도 켠다. 트렁크를 포함한 문을 다 열고 전조등 후미등을 켠다. 차와 마주 보고 차주가 세 번 절한다. 남은 가족이 세 번 절하고 바퀴마다 막걸리(곡주)를 뿌리면 끝. 


고사 후 북어를 실로 감아 홀수일 동안 트렁크에 보관하라느니 앞바퀴로 계란을 깨라느니 손 없는 날에 축문을 외워가며 하라는데 그 정도 정성을 들일 만큼 믿진 않는다. 내 편할 대로 준비하고 구색만 맞춘다. 돼지머리와 북어는 종이 접기로 대체, 과일은 집에 있던 사과와 감 두 알씩만 올렸다. 막걸리만은 제대로 갖추려 했으나 마트에 신분증을 놓고 가서 못 샀다. 차 딜러가 준 와인으로 대체. 곡주가 아닌 과실주지만 네덜란드 신령들은 좋아할 거야.


시간은 밤 8시에 하라는데 마침 한국시간으로 그 시간, 네덜란드는 낮 12시라 시작했다. (완전 내 멋대로다.) 도로를 바라보던 차를 우리 집을 향하도록 주차하고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 초는 자꾸 꺼진다. 초 세워둔 게 어디냐. 지나가던 더치들이 미개하게 볼까 봐 얼른얼른한다. 미신 안 믿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해줘서 고맙다. 애들은 절을 왜 하냐며 안 한다. 블로그에서 차주가 하는 거랬으니 니들은 안 해도 돼. 난 해야지. 간절한 마음으로 국적불문의 신령들에게 절했다. 


차 이름은 백구로 지었다. 매달 오백구 유로를 내고 새하야니 백구 같아서. 고사 지낼 때 안전을 기원하던 마음이 백구를 볼 때마다 새로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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