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푸른 Jul 15. 2023

더치 사수에게 결혼 선물을

네덜란드 회사생활 1

작년부터 사수는 예고했다. 올해 6월, 쉰 살이 되기 전 동거하는 여자친구와 결혼할 거라고. 날짜가 진즉 정해졌지만 초대의 낌새는 없었다. 그래도 사수가 결혼하는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주변에 물어봤다. 돈을 걷어서 선물과 카드를 주는 모양이다.


사수 주변 인물을 보아하니 내가 선물을 주도할 적임자다. 밀접하게 함께 일하고, 주변에 나서서 챙길만한 사람이 없는데, 나는 남 챙기는 걸 좋아한다기 보다 챙겨지지 않는 걸 못 본다. 매니저에게 내가 하겠다 하고 메일을 썼다. "R의 결혼 기념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합니다. 참여 여부는 자유입니다. 링크를 통해 원하는 만큼 송금해 주세요. 저녁 식사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쁜 축하 카드를 사서 팀원들의 사인을 받았다. 열댓 명이 카드 곳곳에 남긴 메시지를 보니 그것만으로 이 결혼이 길해지는 것 같다. 나는 따로 카드를 사서 결혼에 관해 가장 좋아하는 인용구를 썼다.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 나는 늘 뭔가 딴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하세요. -무라카미 하루키" 이제 막 결혼하는 커플에게 내가 얼마나 숱하게 딴 생각을 했는지를 밝힐 수 없지만... 원만한 결혼생활을 위한 결혼 선배의 꿀팁이니 새겨두길.

액수는 2유로에서 15유로 사이로 자유로웠다. 한국의 축의금 문화처럼 누가 얼마나 마음을 냈는지 알려야 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여기 관습대로 안 하기로 했다. 적게 내거나 안 낸 사람을 알아 치졸해지는 마음을 예방하는 것도 받는 사람을 위한 일이니. 총액은 두 번째 리마인드 메일을 보냈을 때 다시 솟아서 내가 염두에 둔 선물도 업그레이드되었다. 선물은 식사 기프트카드(100유로), 샴페인(25유로), 꽃다발(15유로). 각각 집에서 우편으로 받고, 전 날 Liquor store에서 사두고, 당일 아침 마트 개장시간에 맞춰 샀다.


사수는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케이크를 나눠 먹자며 일정을 잡았다. 그때 맞춰 짜잔 하고 나타나니 점잖은 사수가 환희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양손에 선물을 가득 받아들면서도 활자 중독이라 내 카드의 글자부터 해독하는 모습도 너무 사수다웠고. 사수에게 준 선물은 내가 좋아하는 류의 선물이다. 받는 기쁨을 상상하느라 주는 기쁨이 배가 되었다. 공금을 팍팍 쓰며 잠시 사치스러운 기분도 누렸고.


끝으로 돈을 보낸 동료들에게 지불 내역을 정리해 보냈다. 비밀 참조로 보내서 누가 보냈는지는 나만 알지롱. 이건 관습은 아닌데 관습이 되었으면 하는 절차다. 궁금한데 물어보기엔 의심하는 것 같으니까 믿어버리기로 하지만 믿음이 어디 의지만으로 되나요. 누구나 자기 돈의 쓰임을 알 권리가 있으니 충족해 주고 싶다. 그냥 내 성미가 이런 걸 밝히지 않으면 속이는 것 같고 찝찝하다. 그리하여 미션 깔끔히 완료!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롱 고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