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회사생활 2
원래 오피스 출근을 좋아한다. 자전거로 30분간 쌩쌩 달리면 자질구레한 것들이 서라운딩으로 말을 거는 집안일의 세계에서 일 외에 모든 것을 잊어 보라는 일의 세계로 손쉽게 넘어온다. 오피스에서는 잡담도 일도 더 용이하다. 온라인으론 잡담이 시작되지도 않지만 오피스에선 가볍게 안부를 묻고 그 조차 합당한 일 같다. 일할 때는 딸리는 영어만으론 답답한 의사소통을 손짓, 말투, 그림을 동원해 활로를 넓힌다. 높낮이 조절이 되는 책걸상과 듀얼 모니터도 편리하다. 그래서 웬만하면 늘 오피스에 간다. 그런데 아침부터 장대비가 내린다. 얼마 전 중요한 설계 리뷰를 끝냈고 여름휴가까지 이틀 남은 상태라 마음이 해이하다. 그래, 오늘은 재택근무다.
한두 시간 앉았는데 의자가 불편하다. 그동안도 불편한 줄 알았지만 바꾸기 귀찮아서, 오피스 가면 된다며 못 본체 했다. 꾸준히 쌓여온 거슬림은 비로소 임계점을 넘었다. 불편한 원인은 좌판과 머리받침. 이 의자는 좌판이 뒤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엉덩이를 깊숙이 넣으면 뒤로 쑥 빠져서 오뚝이처럼 몸통이 앞으로 휘게 된다. 그럼에도 뒤로 등을 기대면 날개뼈 보다 머리가 먼저 닿는데 그럼 목도 휜다. 의자 끝에 앉아 허리를 세워봤지만 닿는 면적이 좁아지니 힘이 들고 금세 자세가 흐트러진다. 다시 덜 힘들겠다고 엉덩이를 쑥 집어넣었다가 이내 불편해서 끄트머리로 옮겨 앉았다를 반복하다 보니 이건 어떻게 해도 바른 자세가 불가능한 의자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IKEA 브랜드를 믿고 앉아보지도 않고 산 내 탓이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오피스 의자를 신청해 보란다. 바로 했다. 4주 안에 온단다. 그럼 이 의자는 처분해야지. 돈이 급한 것도, 새 의자가 바로 와서 쓰던 의자가 거슬리는 것도 아니니 시간 여유가 있다. 그럼 가격을 높이자. 새것 값을 검색하니 300유로다. 다만 그건 팔걸이가 있고 내 건 팔걸이가 없다. 그래도 내 거 상태가 아주 좋으니 내 맘대로 120 유로. 그다음은 사진. 불 켜고 커튼을 활짝 열어 조명발 받게 하고, 주변 물건 싹 치워서 단정한 주인의 물건처럼 찍었다. 그리고 회사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렸다. 새것 같은 오피스 의자 팔아요. 다음 주부터 휴가 예정이니 개인 번호로 연락 주세요. 네덜란드 중고거래 사이트인 Marktplaats에도 들어갔다. 비슷한 정보로 올리려는데 이 자식이 내 의자를 감정한다. 새것 같다 해도 20에서 65유로 가치밖에 안 된다고. 이미 마음이 떠난 의자라 그 가격에 설득이 되었다. 흔한가 보네. 불편하기도 하잖아. Marktplaats는 노출 빈도를 올려주겠다며 홍보비를 써보란다. 싫다. 그럼 더 안 팔리겠네. 65유로로 올렸다.
점심 먹고 일하는데 낯선 사람에게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의자 아직 살 수 있나요? 네! 팔걸이는 없나요? 네... 그래도 그는 사려던 의자였다며 바로 픽업 날짜와 주소를 묻는다. 주소를 알려주고 휴가 전인 주말까지 픽업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좋다며 Marktplaats에서도 내 의자를 봤다고 했다. 헐, 거긴 반 가격인데. 당장 지웠다. 혹시 65유로로 생각할까 봐 떨리는 마음으로 얼마 생각하냐고 물었다. 120유로? 내가 적은 걸 왜 묻냐는 듯한 의아함이 화면을 뚫고 느껴진다. 휴. 65유로는 못 봤나 보다. 픽업 시간을 토요일 오전으로 정하고 의자를 깨끗이 닦았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의자의 시세를 안다. 이 남자는 알 수도 있었다. 나는 남자가 아는지 모르는지 물었고, 그가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내민 가격은 시세의 두 배다. 나라면 안 산다. 반면 나여서 꼭 판다. 그러니 사기꾼이 된 듯 마음이 켕긴다. 값을 깎아야 하는 건가.
근데 켕길 건 또 뭐람. 시세는 누가 정했는데. 사설 중고나라잖아. 중고나라가 추천한 가격이 실제 시세인지는 모를 일이고, 판매자가 싼 가격에 올리면 중고나라는 매력적인 플랫폼이 되므로 중고나라에 좋은 일이다. 즉, 낮은 시세는 시세를 정한 이에게 이득이다. 그리고 난 누구도 속이지 않았다. 거래 조건을 올렸고 성사되었을 뿐이다. 나에게 제 발로 찾아온 구매자에게 이미 이 거래는 매력적이다. 거기에 내가 역할가정까지 해가며 상대의 최대 이득 여부를 헤아릴 필요는 없다.
착해지고 싶나 보다. 근데 이 마음은 투 머치다. 물건 상태를 정직하게 올리고, 연락을 바로 주고 받고, 약속시간을 잘 지키면 충분히 착한 것이다. 내 이익을 꺾어가며 남 챙기는 건 착함을 과하게 선망하는 것에서 비롯된 왜곡된 자기 만족이다.
그는 출발 전 네비에서 안내하는 예상시간을 보내는 매너남이었다. 처음 봤지만 같은 회사 소속임을 알아서 친근하다. 내가 판매 글을 올리기 전 날 같은 의자를 주문했는데 내 게시글을 보고는 바로 취소했다고. 득템을 목전에 둔 듯 옅은 흥분이 느껴진다. 그는 왜 파느냐고 묻는다. 사실대로 말할 순 없다. 안 살 것 같아서는 아니다. 같은 회사 사람끼리 변덕 부리기 그럴 것이고, 같은 모델을 사려 한데다 여기까지 직접 차 몰고 온 사람이 내 불평 한마디에 이 구매를 취소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건의 나쁜 첫인상은 쓰는 내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물건값을 깎아줄 순 없지만 나쁜 인상을 피하도록 성의는 보일 순 있다. 그런데 나는 그다지 순발력 있지도, 거짓말에 능하지도 않은 사람이 아니라 가장 덜 해로운 이유를 말한다.
"회사에서 오피스 의자 지원해 주더라고요..."
"아 그렇군요."
아무렴 어떻냐는 식으로 지체없이 120유로를 주고는 그는 의자와 함께 선선히 떠났다.
나한테 안 맞는 의자였지만 깨끗하게 썼어요. 당신에겐 잘 맞길 바래요. 당신에게도 불편하다면 당신도 회사에서 지원받으시길... 120유로 중 20유로는 휴가 가서 애들이랑 두더지 게임하는데 잘 썼다. 지갑에 있는 나머지는 볼 때마다 흐뭇하다. 착한 척 한답시고 나대지 않길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