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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푸른 Jan 22. 2024

이것은 추모인가

슬픔을 찾아서

2023년 말, 좋아하던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 한 인생이 끝나버렸다. 믿을 수 없어서 장례식과 운구과정을 훔쳐보았다. 어두운 밤, 비통한 표정의 손님들이 장례식을 드나든다. 환한 낮, 모자이크 된 소년이 영정사진을 들고 앞장선다. 아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연신 눈물을 훔친다. 아, 이것은 현실이구나.


그가 출연한, 나의 인생 드라마를 돌려보았다. 영화도 찾아보았다. 작품 속 그는 살아있다. 완벽하게 새로운 인물로, 눈을 뗄 수 없는 연기로, 인물의 감정을 화면 밖 나에게 심어놓으며. 각 역할에 자기의 일부를 녹여냈을 터. 어떤 역할이든 자신과의 접점을 제대로 입히는 그, 그를 보고 싶었다. 그로서 출연한 방송들을 찾아보았다. 십수 년 전부터 불과 작년 시월까지, 인터뷰, GV, 관찰예능, 유튜브 방송 등 수많은 자료를 남겼다. 


방송 속 그는 일관되다. 호탕한 웃음, 진솔한 눈빛, 연기에 대한 열정, 타고난 입담. 보다 보면 유쾌하고 웃긴 그 덕분에 어느새 깔깔 웃고 있다. 그가 없는 지금의 슬픔을 과거의 그가 달래는 희한한 모양새다. 사실 달램은 영상을 보는 동안만이다. 끝나고 나면 허무는 깊어져있다. 눈으로 감각한 그의 생과 뉴스로 인지한 그의 죽음이 불일치. 간극을 외면하려 다른 영상을 보고, 또 보고... 이제 남은 영상이 거의 없다.


좋아했어도 적극적인 팬은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배우에게 메어있는 스스로가 의문이다. 이렇게 슬플 일인가.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슬프고 싶은 건가. 슬픔에서 멀어질 틈 없이 과거 영상을 계속해서 보고 있으니. 왜 슬프고 싶지. 삶이 무료한가. 가까운 슬픔을 찾아봐도 될 텐데.


가까운 슬픔, 주변의 슬픔은 사실 파헤치고 싶지 않다. 나에게 드러내지 않고 나도 묻지 않는다. 모르고 싶을지도. 연루되니까. 남의 슬픔이 내 슬픔이 아닐 수 있다. 남의 슬픔에 슬픔을 가장해야 할지 모른다. 혹은 정말 슬퍼질지도 모른다. 그럼 마음을 다 내주지 못하는 속 좁은 내 마음이 초라해질지 모른다. 


그래서 안전한 슬픔을 바랐던 것 같다. 내가 관객일 뿐인, 극장 밖을 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조금의 타격이 없는 멸균된 슬픔. 사회적 동물의 본능인 슬픔에 공감하려는 욕구를 혼자가 일반인 시대에 해결하는 방법. 소설과 영화의 슬픔은 허구라 시시하고, 현실 속 나와 주변의 슬픔은 파헤치기 괴로우니, 가상 같은 실제 슬픔을 나에게 끌어오기. 깔끔하게 슬퍼하기.


이제 이 슬픔은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 종결 가능한 슬픔 말고 굽이굽이 내 안에, 근처의 몸들 깊숙이 흐르고 있는 슬픔을 발굴하고 싶다. 용기와 끈기를 갖고 나 너 안의 위험한 슬픔들을 마주하고 엮고 보살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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