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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현 Jun 22. 2022

오래된 나의 볼펜

버릴 수 없는 너...


저 볼펜이 내 손에 들어온 시기는 지금부터 대략 7, 8년 전이다. 친하게 지내는 분이 새로운 회사에서의 출발을 축하하며 쓱쓱 잘 나가라며 잘 써지는 볼펜을 선물해 줬다. 하나로 네 가지 색 볼펜에 샤프까지 되는 아주 유용한 놈이었다. 써지기도 얼마나 잘 써지는지.... 정말 이놈 하나만 썼다. 가끔 다른 볼펜이나 연필을 쓸 때도 있었지만 항상 이놈이었다. 출장도 같이 다니며 출장 현장을 공책에 기록해 줬고, 일기장에 내 생각도 담아내 줬다. 서명할 일이 있어도 이놈이 함께 했다. 행여라도 잃어버리면 어떻게든 찾아냈다.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래서 5년 지난 어느 날 볼펜 심을 갈아 끼우기 위해 열어야 하는 부분이 꽉 물리지 않아, 글을 조금이라도 쓰려면 앞과 뒤가 자꾸 분리되기 시작했을 때 정말 슬펐다. 앞으로 5년은 더 하리라는 마음으로 널 채울 리필 심도 10개씩이나 사뒀단 말이다...

 

버려야 하나, 계속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내가 찾은 답은 마스킹 테이프였다. 헐거워져 자꾸 떨어지는 부분을 마스킹 테이프로 둥둥 감아주었다. 치료를 받은 볼펜은 다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줬다. 다만 볼펜 잉크가 다 떨어지면 한 번씩 상처를 다시 동여매 줘야 한다. 볼펜을 위한 드레싱이라고 해 두자. 드레싱을 해 줄 때면 연결 부위는 내 손의 열에 녹은 잉크로 늘 끈적거렸다. 그래도 뭐 어떤가? 이 치료로 나는 이놈과 인연을 이어갈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볼펜 살 고민도 없고, 사놓은 리필심도 끝까지 다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드레싱을 하기 시작한 덕에 전엔 없는 꾸밈도 할 수 있게 됐다.

 

오늘 아침도 드레싱 작업이 있었다. 볼펜을 감쌌던 공룡 마스킹 테이프를 떼고 그 아래 초록 마스킹 테이프를 뗐다. 날이 더워서인지 더 끈적거리는 것 같았다. 뚜껑을 빼고 다 쓴 초록 볼펜심을 꺼낸 후 갈아 끼울 심을 넣어줬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은 나사형의 조임이라지만 세월이 돼서인지 그냥 쑥 끼우면 들어간다. 돌리기? 필요 없다. 그리고 끈적이는 접착제를 알코올 솜으로 닦아줄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플라스틱으로 된 나사 조임이 어느새 닳았던 것처럼, 알코올 솜으로 몸통을 닦으면 고무 부분이 왠지 줄어들 것 같은 근거 없는 기분 때문이었다. '테이프로 가리니까. 다음에 닦아주지 뭐'. 초록 마스킹 테이프를 발라줬다. 그리고 이번에는 분홍색의 아마존강 돌고래를 붙여줬다. 깔끔하게 드레싱을 붙이고 나니 아주 인상이 훤해졌다. 이렇게 또 나는 이놈과의 인연을 다시 연결했다.

 

애증 같다. 처음에는 필기구를 다시 사기 귀찮아서였는데, 잃어버리고 다시 찾길 여러 차례 하다 보니 더 정이 생겨버렸고, 그렇게 손에 붙다 보니 더 좋아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이제는 버리고 싶어도 이놈과 나의 인연 때문에 버릴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애착 관계가 되었다. 이 볼펜처럼만 쓰면 버리는 물건도 확 줄어들겠지? 그럼 팔아서 돈 벌어야 하는 사람 빼고는 다 좋겠네? 흠.. 그분도 답을 찾을 거야. 리필 심 팔면 되니까. 그래, 뭐든 오래 쓸 수 있으면 오래 쓰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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