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아도 밟히지마 ep.06]
인터넷 방송국의 아나운서였던 나는 TV로 볼 수 있는 진짜 방송국(?)으로 이직하는 것이 당시 나의 계획이자 바람이었다. 입사 후 6개월이 지났을 즈음, 나는 법률 TV의 프로그램 진행자로 합격하게 되었고 사장님께 퇴사 의사를 말씀드릴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타이밍은 좋지 않았다. 퇴사를 결심했던 나의 마음과 다르게 사장님께서는 내 월급을 올려줄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때 나는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영어교육방송의 MC를 맡고 있었는데 방송을 눈여겨보셨던 사장님께서는 나의 업무에 대한 성과를 인정해주셨다. 퇴사를 밝히러 들어간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월급 인상 제의를 받았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변함없었기에 사장님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면서 앞으로 출근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사실 아나운서 지망생 못지않게 현역 아나운서들도 계속해서 취업 준비를 한다. 아나운서에게는 소속 방송국의 타이틀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더 큰 방송국으로 이직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자 당연한 분위기였다. 나의 최종 목표는 지상파 진출이었다. 그전에 TV 방송 경력을 많이 쌓고자 했던 나는,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지상파에 갈 수 있을 것 같지? 절대 못 가. 내가 장담하지! 자네는 절대 지상파에 못 갈 거야.”
20대 초중반이었던 어린 나에게는 특히 더 모진 말이었다. 충고였을까? 협박이었을까? 아나운서들이 어떤 목표를 갖고 취업을 준비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당시 사장님은 가장 불안한 고민을 잔인하게 들쑤셨다. 그 뒤 대화를 어떻게 마무리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넌 절대 지상파에 갈 수 없다’는 저주에 가까운 뼈아픈 말만 남아있을 뿐. 그만큼 무섭고 섭섭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난 갔다. 그 어렵고 어렵다는 지상파에. 나 같은 애는 절대 못 갈 거라는 방송국에 결국엔 취업했다. 숱한 불합격을 마주할 때마다 그 사장님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정말 나는 안 되는 걸까?’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단정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의 능력과 가능성을 쉽게 평가하고 기정사실로 한다. 그건 무서운 것이다. 어떤 꽃이, 어떤 열매가 맺힐지 모르는데 말 그대로 싹부터 자르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나마 다행인 건 뿌리가 뽑힌 것은 아니었다. 힘들게 움을 틔운 여린 새싹은 베였지만, 나의 뿌리까지 들리진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흐르니 어김없이 꽃도 피고 열매도 맺혔다. 그 누구도 당신의 뿌리까진 어찌하지 못한다. 물론 싹이 베일 땐 많이 아프지만, 그래도 곧 싹은 다시 돋아나고 틀림없이 아름다운 꽃도 훌륭하게 필 것이다.